유도발 선생은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이 체결되자 일제의 지배에 놓인 세상에서 차마 살아갈 수 없다며 11월 11일부터 단식에 돌입했다.

유도발 선생은 “종사가 망해 장차 남의 나라의 백성이 되겠으니 남은 해가 얼마 없는데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하는 것은 욕된 일이 아닌가. 이후로는 다시 음식을 나에게 권하지 말라”는 유서와 함께 명정(銘旌)에 ‘대한처사’로 써줄 것을 부탁했다. 단식 17일째 되던 날 유도발 선생은 향탕으로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아들 유신영 선생은 항일 인사들과 교류하며 학문과 사상을 넓혀 나가는 한편, 두 차례 의병에 참여해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1월 고종 서거 후 고종이 친일파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유신영 선생은 “나는 나이가 많아 일할 수 있는 힘이 없다. 마땅히 목숨을 바쳐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고 말하고 1919년 3월 3일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두 부자의 죽음은 일제에 대한 강력한 항거이자 사람들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우는 울림으로 전달됐다. 정부는 이들의 공훈을 기려 1962년 유도발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1991년 유신영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저작권자 © 나라사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