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 선생은 부여 출신으로 1913년 휘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던 중 은사인 이세영을 따라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 군사 지식을 배웠으며, 졸업과 동시에 교관으로 임명돼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선생은 1920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학도단장 및 김좌진 장군의 부관으로서 청산리전투의 영웅들을 배출하는 한편 청산리전투에 참전했다. 북로군정서군은 사관연성소 출신으로 이루어진 만주 독립군 부대 가운데 가장 훈련이 잘된 정예부대였으며,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만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지역에서 일제와 벌인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선생은 청산리전투 이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로 이동했으나 자유시참변 이후 다시 만주로 돌아와 1922년에 북로군정서 부사령관으로 활동했다.

또한 선생은 1923년 중국 상해에서 창간된 국한본문 잡지인 ‘배달공론’에 군사학강의를 두 차례 기고하는 등 군사지식을 보급하는데 힘썼다. 이후 신민부에서 보안사령관을 맡아 총사령관인 김좌진 장군을 최측근에서 보좌했으며, 성동사관학교 교관으로 신민부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해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박영희 선생은 1926년 김좌진 장군의 밀명으로 항일운동의 군자금을 협조받기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활동 중 러시아 첩보기관에 체포됐으며, 1930년 연해주 고루지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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