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고 박두옥 선생의 사진을 늘 서재에 두고 그리움과 자부심으로 살아온 김형근씨. 어머니 사진을 바라보는 그의 눈가가 젖어 있다.

끝나지 않을 것만같던 지독한 장마가 끝나고 하늘이 다시 맑은 기운을 되찾았다. 푸릇한 생명력으로 가득차 짙은 녹음이 우거진 여름의 한가운데서 독립유공자 후손인 김형근(82)씨를 만났다. 지난달 15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김형근씨는 어머니 고 박두옥 선생을 대신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박두옥 선생이 전주에서 교원중심의 일제에 반하는 비밀결사단 활동을 펼친지 80년만이며, 박 선생이 돌아가신지 무려 35년만의 일이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무대 단상에 오르는 김형근씨는 아득한 기억 속 어머니를 떠올렸다. 중학생 손녀와 팔짱을 낀 손이 가늘게 떨렸다. 곱단하게 올려 묶은 머리와 항상 단정한 차림새로 부지런하게 사셨던 어머니, 사랑을 다해 마음을 다해 두 형제를 키워주신 어머니를 그리자 그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두 아들에게 박두옥 선생은 어머니이자 인생의 스승 같은 존재였다. 전주보육학원 재학 중이던 22살, 어머니는 교원 중심의 비밀결사단에서 전령사 역할을 했다. 선생은 단원들의 집에 낮은 담장과 기와 사이에 회합 날짜를 적은 쪽지를 몰래 숨겨두며 조직활동을 했다. 일경에 붙잡혀 구타와 물고문 등 큰 고초를 겪어야 했다.

“어머니는 3·1절이나 광복절이 되면 그때 일을 떠올리셨어요. 가끔 형과 저에게 당시의 긴장된 순간들을 이야기해 주셨고, 또 저는 저의 아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어머니의 독립운동사는 우리 가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어머니의 공훈을 인정받으려 독립유공자 신청을 알아봤지만 뒷받침해줄 자료가 부족했습니다. 오늘까지 오기에 참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머니의 독립운동사는 그렇게 가족 모두에게 풀지 못한 아쉬움으로 남았고, 지난해 김형근씨의 셋째 아들이 혹시나하는 마음에 국가기록원에서 할머니의 성함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1935년에 발행한 신문에서 할머니가 재판을 받았던 내용이 실린 것을 확인해 어렵게 할머니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었다.

“15일 건국훈장을 받아들 때 어머니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 생전에 받으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늦게나마 어머니의 공적을 찾아드리게 되어 기쁜 마음이 교차하며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상을 받아들고 집에 가기 전 가족들과 식사를 하며 손자, 손녀들에게 ‘할머니가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니 자부심을 갖고, 또한 할머니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바르게 살아라’ 하며 일장연설을 하기도 했죠.”

박두옥 선생은 20대 초반에 독립운동을 한 것은 물론 29세에 남편을 여의고 그때부터 홀로 두 아들을 굳건히 키워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부지런히 일했고, 가족을 보살피는 한편으로 배를 곪는 고아들을 돕기도 했다. 연세 드신후에도 두 아들로부터 용돈을 받으면 생필품을 사서 고아원과 양로원에 기부하는 분이었다.

“참 대단한 분이셨어요. 홀로 두 아들을 키워야 하는 상황이지만 흔들림 없는 원칙으로 현실을 이겨내셨죠. 일경의 모진 고문도 겪었으니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다는 마음이 아니셨을까 싶어요.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형님과 저는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고자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독립운동의 기운과 나라사랑하는 마음은 가족에게로 고스란히 전달됐다. 김형근씨는 월남전에 참전하는 등 육군으로 24년을 복무해 중령으로 예편한 참전유공자.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 장교로 복무를 마쳐 최근에는 ‘병역명문가’ 신청을 준비 중에 있다.

이제 김형근씨는 주인 찾은 훈장을 보관할 함을 만들고 천안의 어머니의 묘소를 찾을 날을 잡고 있다. “자랑스런 어머니, 박두옥님. 독립유공자로 다시 우리 곁에 오심을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날 가족 모두가 만날 자랑스러운 어머니가 다시 그리워진다.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어머니를 대신해 훈장을 받는 김형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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