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길목에서 선선한 바람이 느끼며 책장을 한 장 넘긴다.

푸른 녹음이 무르익어가는 여름의 초입, 선선한 바람과 서서히 따가와지는 햇살이 또 다른 계절을 맞는 이들의 마음을 흔든다. 가슴 두근거리며 발걸음이 절로 밖을 향하는 계절이지만 코로나19로 조금 더 발을 묶어둬야 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수만 번 번뇌하며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담은, 이제 원로가 된 시인의 숨결을 느껴본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시인

1980년대 혜성처럼 등장한 시인 황지우. 기존의 정통적인 시 관념을 과감하게 깨뜨리며 대담한 실험과 전위적인 시 쓰기로 단연 문제 시인으로 떠올랐다.

그의 첫 시집 표제작이자 대표작인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로 시작해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라는 구절에서 군사독재로 피폐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신의 소망을 드러내면서도 현실에서는 다시 주저 앉아버린 자신을 꼬집는다. 이처럼 그는 민주화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통렬한 사회비판은 물론, 보다 날카롭게 자신의 무력감과 태도를 비판하며 시를 통해 시대를 풍자해왔다.

비통한 시대를 온 몸으로 겪어내며 그 슬픔을 파괴적 시어로 표현해내며 충격을 줬던 그는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를 통해 데뷔 시절의 날카롭고도 통렬한 시선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나이가 들면서 익어가는, 앞으로 도달해 갈 스스로의 삶을 직시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때로 고통이 된다. 치열하게 시대와 맞서면서 처절한 슬픔을 분출해냈던 그의 시어들은 이제 지나온 생애에 대한 회환과 연민이 뒤엉킨 정념으로 되살아난다.

시집의 제목으로 쓰인 ‘어느’ ‘흐린’ 단어가 지닌 모호함처럼 다가왔다가도 멀어지고,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우는 것 같으면서도 담담한 그의 시 세계가 요즘의 세상을 닮아 있는 듯하다.

<여행자 나무> 김명인 시인

김명인 시인은 ‘길 위에 선 시인’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평생을 기억과 시간이 인간의 삶에서 갖는 근원적인 의미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해왔다.

그는 6·25전쟁 이후 어지러운 사회 변화를 온 몸으로 겪으며 개인의 상처뿐 아니라 사회 깊숙이 새겨진 상흔을 파고들어 고스란히 시로 써내려왔다.

그의 10번째 시집 ‘여행자 나무’는 여전히 길 위에 서 있는 방랑자로, 이제는 노년에 접어든 인간으로서 늙어감에 대한 사유를 담았다.

우리는 나이 들어가면서 많은 것을 배우지만 이따금씩 어찌할 수 없는 과거를 미워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축적된 시간만큼 살갗에 새겨진 상처와 방랑의 순간들마저 무한한 사랑으로 감싸 안는다.

그는 흘러가는 시간이 축적된 몸에 빛이 잦아들고 어둠이 스며들지만, 이는 빛을 잃는 것이 아닌 어둠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라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파일명 서정시> 나희덕

89년 등단한 이래 30년간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과 간명하고 절제된 형식으로 생명과 죽음, 사랑을 노래한 시인이 낯익은 세계를 벗어나 새 장을 열었다.

대체로 감정과 정서를 아름답게 표현하던 서정시라는 단어는 ‘파일명’이라는 단어와 함께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냉전시대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를 감시하며 작성한 자료집 명을 그대로 가져와,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여기는 세상에 대항한다.

그는 고대 인도의 설화,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쁘리모 레비의 증언 등 다른 장르의 텍스트를 시로 재구성하며, 블랙리스트나 세월호사건과 같이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비극과 재난의 구체적 면면을 시 속으로 끌어들였다.

여러 사건들로 돌출된 사회의 민낯과 어이없는 죽음들 앞에서 시인으로서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함께 무엇도 말할 수 없는 절망감 사이에서 느낀 고통이 고스란히 담겼다.

흔히 시는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난해하고 복잡한 어떤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시인의 이 시집은 다르다. 존재의 아픔과 사회 곳곳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헤집어내며 비극을 직시하는 그의 피 흘리는 말들을 읽어 내려가며 ‘시는 무엇인가’ ‘시인은 어떤 사람인가’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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