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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광주’ 신군부에 맞선 항쟁 … 한국 민주주의의 앞날을 열다기록 - 5·18민주화운동 열흘간의 항쟁
나라사랑신문  |  news@narasara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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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4.29  09: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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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5월이면 광주 옛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에는 조금 특별한 햇살이 비친다. 광주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진입로에는 하얀색의 이팝나무가 함박눈처럼 꽃으로 피어난다. 18일 기념일 당일이 되면 이팝나무 아래를 걷는, ‘오월광주’를 가슴에 안은 이들의 가슴에는 회한이 가득 찬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역사는 이 일을 ‘1980년 불법 집권을 획책하는 신군부세력을 거부하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광주시민의 위대한 항거’로 기록하고 있다. 열흘간의 기록, 그 가운데로 들어간다.

유신의 붕괴, 신군부의 반란
집권의 획책, 시민의 항거

10·26, 유신의 심장이 무너졌다. 국민과 지배집단의 대립이 격화되던 중 지배집단 내부의 균열에 의한 정치적 돌발사태였다. 그렇게 공고했던 박정희 체제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박정희 체제의 붕괴는 사실상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야당이 여당을 누르고 총투표에서 더 많은 표를 얻는 것으로 시작됐다. 민심의 이반이 확인되자 유신정권은 몰락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1979년 8월에는 여성 노동자 농성을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희생자가 나온 와이에이치(YH)사건이 세상을 흔들었다. 김대중은 자택 봉쇄됐고, 김영삼은 국회에서 기습 제명됐다.

이어진 부마항쟁. 10월 16일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는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시위는 부산 시민들의 참여로 타올랐다. 17일은 민중봉기가 일어나는 듯 부산시내 파출소가 파괴됐고, 유신정권은 18일 0시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에 아랑곳 않은 시위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마산으로, 창원으로 확대됐다. 16일부터 19일까지의 부마항쟁은 정권을 마지막 위기로 몰았다.

그리고 10월 26일 18년 장기독재의 주역 박정희는 권력 최측근인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사망했다.

그렇게 맞은 1980년 서울의 봄. 학원민주화투쟁으로 시작한 대학생 시위는 5월 ‘계엄령 해제’ ‘유신잔당 퇴진’ ‘노동3권 보장’ 등을 외치며 민주화를 향한 열기를 높여갔다.

   
 

광주, 멈추지 않는 함성의 도시
태극기와 애국가 멈추지 않은 열흘

1980년 봄 광주. 광주의 학생운동은 12·12사태를 거치면서 학원민주화투쟁으로부터 시작해 민주주의의 완전한 쟁취를 위해 힘을 모아가고 있었다.

민주화투쟁이 본격 시작된 것은 전남대 비상학생총회가 5월 8일부터 14일까지 1주일을 민족민주화성회 기간으로 정하면서부터다. 이후 전남대와 조선대가 연대해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내는 등 투쟁 열기를 높여갔다. 14일 민주화성회 마지막 날 가두로 진출한 7,000여명의 학생들은 도청 앞에서 집회를 강행했다.

15일에는 대학생 1만여 명을 포함해 교수, 청년, 시민 등 5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민주화성회가 열려 민주주의의 열망을 뜨겁게 드러냈다. 그리고 시민들은 정부의 답변을 기다리기 위해 16, 17일 시위를 일시 중단했다.

그러나 그 순간 신군부는 다음날의 역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신군부가 민주화 시위의 마지막 숨통을 조이기 위한 마지막 극약 조치였다.

5월 18일. 5·18민주화운동 최초의 도화선은 18일 전남대 교문 앞에서 시작됐다. 그간의 집회과정에서 ‘휴교령이 내려지면 다음날 10시 교문 앞에서 모이자’ 했던 약속대로 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시위대의 숫자가 늘어나자 공수부대는 무자비한 진압으로 시위를 막으려 했지만 학생들은 광주역으로, 금남로로, 가톨릭센터로 진출하며 함성은 확산됐다. 진압도 더욱 폭력적으로 변해 공수부대원들은 젊은 남자들을 보이는 대로 구타하고 옷을 벗겨 포박, 연행하기 시작했다. 유혈참극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19일, 공수여단이 광주로 증파됐다. 그러나 시민들은 오전 10시부터 금남로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10시 40분부터 최루탄으로 해산을 시도하는 공수부대와 쫓고 쫓기는 상황이 연출됐다. 공수부대의 진압작전은 잔인한 살육전이었고, 해산 유도가 아니라 마치 적을 무찌르겠다는 기세였다. 무자비한 시위진압은 시민들을 자극했고 그만큼 싸움은 치열해져 중상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광주의 병원은 부상자들로 초만원을 이뤘다.

20일, 공수부대가 또다시 증파됐지만, 점심시간을 넘어서자 시위 인파는 10만을 넘어서며 금남로를 뒤덮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이 알려지면서 일부 시민들이 흥분해 차량을 동원한 시위가 계속되면서 시위는 뜨거워졌고, 폭력적 진압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밤 11시경에는 최초의 실탄 발포가 이뤄졌다. 광주역에서 시작된 이 발포로 시위대 앞의 시민은 총격으로 쓰러졌다.

21일, 광주역에서 계엄군에 대한 총격이 있었다는 소식이 알려지고, 총격으로 사망한 시신 2구가 대형태극기에 실려 시내로 옮겨졌다. 시민들은 총을 든 진압작전에 맞서기 위해 손에 닿는 대로 기구를 들어 원시적 무장을 시작했다.

10시 10분경, 진압 공수부대원에게 발포를 위한 실탄이 지급되고 오후 1시 정각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이를 신호로 무차별 집단발포가 시작됐다. ‘횡대무릎쏴’ 자세는 누군가의 명령으로 시작됐고 10여분 후 ‘사격 중지’ 명령이 메가폰으로 전달되면서 사격은 중지됐다.

금남로는 피바다를 이뤘고, 시민들이 가득 찼던 거리는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곳곳의 옥상에서는 저격병들에 의한 겨냥 사격이 계속됐다. 훗날 자료에 따르면 이날 최소 54명이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었다.

이제 시민들은 광주 인근 도시를 돌며 무기를 확보하고 자위권 행사를 위한 무장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민군이 탄생했다. 무장 시민군의 응사가 시작되자 계엄군은 오후 5시 총퇴각했다.

시민군은 교도소를 제외한 전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내고 질서를 되찾았다. 이때부터 항쟁은 광주에 머물지 않고 목포, 화순, 나주, 함평,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등 전남 지역으로 광범위하고 급속하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특별한 것은 기간 내내 태극기와 애국가가 함께했다는 것이다. 외신들도 놀랍게, 시민들은 대한민국의 내일을 내다보고 있었던 듯하다.

   
 

광주의 대동세상, 시민공동체
강제 진압, 그리고 광주의 부활

항쟁 5일째, 계엄군이 물러나고 새로운 상황이 펼쳐졌다. 22일부터 26일까지 광주는 그야말로 더불어 함께 사는 ‘대동세상’이었다. 시민들은 승리감을 만끽하며 높은 시민정신을 보였다. 그동안의 혼란의 잔해들을 청소하고 지역방어를 위한 시민군을 재편성했다.

22일에는 지역의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으로 수습대책위를 결성했다. 그리고 이어진 기간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고 밤샘 근무하는 시민군에게 앞다퉈 식사를 제공하는 등 광주는 승리와 해방의 기운으로 흘러넘쳤다. 그리고 질서를 잡아나갔다.

시장과 상점도 문을 열었다. 부상자들에 대한 헌혈이 필요하다는 소식에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혈액원에는 피가 남아돌 지경이었다. 그렇게 고립된 광주에는 새로운 공동체가 실현되고 있었다.

내부 수습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26일 갑자기 무력 진압이 준비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진압 하루 전인 26일, 도청 상황실에서는 위험을 감지하고 현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누구도 그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후까지 싸울 수 있는 사람만 남아달라고 하면서 나가는 이들에게 ‘후세에 진실이 왜곡 없이 전달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당부까지 전달했다.

27일 새벽 4시에 시작한 계엄군의 작전은 치밀했다. 도청 내부로 진입한 돌격조는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고 작전은 5시 10분경에 끝났다. 시민군은 마지막 항전에서 모두 스러져갔다. 시내의 YMCA, YWCA, 계림초등학교, 전일빌딩, 관광호텔 등이 모두 진압 당했고 최후의 항전은 끝났다.

항쟁의 피로 물든 아침이 밝아왔고, 이로써 1980년 5월 광주민중의 투쟁도 열흘간에 걸친 역사의 막을 내렸다.

세월은 무심히도 빠르게 지나갔지만 광주는 기어이 부활했다. 해마다 5월이 오면 시민사회를 비롯한 학생들은 5·18민주화운동을 생각하며 유혈 무력진압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소리들이 높아졌다. 권위주의 정권이 계속되는 가운데 광주정신을 되살려 민주주의를 살려내야 한다는 주장과 실천운동이 이어졌다.

1988년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청문회가 열렸고, 1995년에는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전두환, 노태우가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죄 등으로 법적 처벌을 받았다.

1997년 5월 9일 정부는 5·18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공포했다. 그해 첫 정부주관 기념식이 열렸다. 같은 해 5·18신묘역이 준공돼 민주묘지가 됐고, 2011년에는 5·18기록물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렇게 5·18민주화운동은 세계 속의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다. 그 정신을 이어 대한민국은 경제개발에 이어 민주주의에서도 성공한 나라로 칭송받는 기적을 이뤄냈다. ‘오월 광주’는 우리 국민 모두의 가슴에 민주주의의 기폭제로 새겨졌다.

‘유신잔당 퇴진’ 등을 외치며 1980년 도청 앞 분수대에 모인 광주시민들(왼쪽). 계엄군이 물러나고 잠깐의 평화가 찾아온 광주 시내. 시민들이 길가에서 식사와 물을 나눠주고 있다(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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