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식된 것이었다. 1945년 9월 미군이 남한에 진주했다. 그들은 군정을 세우고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이식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황국신민교육을 폐지하고, 민주주의를 교육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민주주의를 조선의 정치체제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정치인들을 비롯한 사회지도층들도 대부분 일제치하 일본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이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1950년 6월에 일어난 6·25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희망 없던 한국 민주주의 4·19혁명으로 기지개

희망이 없어보이던 한국의 민주주의는 1960년 4·19혁명을 시작으로 변화하였다. 4·19혁명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 계기는 이승만 정부가 주도한 3월 15일의 부정선거였다. 여당이었던 자유당은 1960년 4대 대통령 선거, 5대 부통령 선거에서 각각 이승만과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중의 지지를 잃은 자유당의 선거운동은 순조롭지 않았다. 선거유세가 순탄치 않자, 자유당은 민주당 후보 장면의 선거운동을 방해하려 하였다. 그 조치의 하나로 일요일에 고등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게 하였다. 이에 대구 경북고를 시작으로 대구지역의 고등학생들이 2·28민주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학원 내에 미치는 정치세력 배제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후 시위는 전국각지로 번져나갔다.

학생시위는 서울에서도 일어났다. 3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부통령 후보 장면의 선거유세가 있었다. 유세 후 퍼레이드에서 학생 1,000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 학생들은 경찰의 저지에도 “부정선거 배격하자” “썩은 정치 갈아보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대전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3월 8일 대전고 학생들은 민주당 강연회에 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시위를 계획했다. 이들은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장면 후보 강연회가 열리는 대전 공설운동장으로 향했다. 경찰은 이들을 폭력 진압하였다. 이 사건이 ‘3·8민주의거’이다.

거듭되는 시위에도 불구하고, 1960년 3월 15일 예정대로 정·부통령 선거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유당은 각종 불법·부정행위를 자행하였다. 이에 전국에서 시민들의 항의가 계속되었다. 특히 야당성이 강한 마산에서 일어난 사건은 ‘3·15의거’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날 약 1만 명의 시민·학생이 마산시청 일대에 모여들었다. 경찰은 이들을 진압하려고 총과 최루탄을 발사했다. 이로 인해 8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00여 명이 연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등학생 김주열의 눈에 최루탄이 관통하게 되었다. 김주열은 이후 실종되었는데,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그의 시신이 인양되었다. 얼굴에 최루탄이 관통한 김주열의 시신을 확인한 시민들은 더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의 소중한 밑거름 역할

1960년 4월 18일 서울에서는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하였다. 고려대 학생들은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며 재선거 실시를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수의 학생들이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피해를 입었다. 다음날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 일반 시민, 어린아이까지 시위에 합세하여 시위인원은 10만에 육박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폭력으로 진압하여 100여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하였으나 사태를 수습하지는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4월 26일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 하야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시민의 힘을 통한 독재의 종결이었다.

4·19혁명은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여 이룬 결과이지만, 그 중심에는 젊은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은 4·19의 촉매제가 되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군국주의 교육을 받지 않았고, 체계적으로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새로운 세대였다. 이들은 시민과 결합하여 스스로 독재를 무너뜨렸다. 해방 후 약 15년 만에 민주주의는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당시 학생들과 시민들은 4·19세대의 핵심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을 학습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민주주의는 용기와 실천이 함께한 산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의 결과는 시민들에게 스스로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4·19혁명 이후 우리는 두 번의 성공한 군사쿠데타를 겪었다. 이렇게 탄생한 군사정권은 계엄령과 군을 이용해 시민과 민주주의를 탄압하였다. 군사정권의 진압은 무자비했지만, 4·19때 독재를 타도해본 경험이 있는 시민과 학생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군사정권에 대항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과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5·18민주화운동이다. 이들 민주화운동은 군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1987년 6월 10일 일어난 6월 민주항쟁은 전두환 정부로부터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 방안을 수용하게 하는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이러한 발전에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사회통합과 남북화합을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과제를 풀기 위해 우리는 4·19와 60년간의 민주운동사를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 민주운동의 역사는 다양한 계층과 지역의 힘이 합쳐 이루어낸 것이다. 우리는 그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60년 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다. 이것은 60년 전의 4·19혁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4·19혁명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전환점이자, 60년 민주화운동의 모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4·19혁명을 기려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동선(문학박사, 숭실대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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