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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국 민주주의, 60년 민주운동의 소중한 성과특별기고 -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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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3.05  12: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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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그다지 길지 않다. 1960년 4·19혁명부터 따지면 60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60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는 그 어느 나라보다 역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4·19혁명 이후에도 부마 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항쟁을 거쳐 최근 ‘촛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킨 커다란 사건들이 계속 이어졌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1960년 4·19혁명은 단연 첫손에 꼽히는 사건이다. 4·19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같은 해 3월 15일에 있었던 정부통령선거였다. 한국 현대사 속에 온갖 부정선거들이 난무했지만 이승만 정부가 주도한 1960년 3월 15일의 부정선거는 그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3·15부정선거는 ‘사상 최대의 부정선거’로 평가된다.

시민들은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를 좌시하지 않았다. 제일 먼저 부정선거에 맞선 이들은 대구의 학생들이었다. 3·15선거 직전인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는 야당인 민주당의 유세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야당의 선거 유세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고등학생들을 학교에 등교하게 했다. 그러자 대구지역 여러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학원 자유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폭력으로 학생들을 탄압하는 경찰에 맞서 시민들이 시위에 동참했다. 이것이 ‘2·28민주운동’이다.

1960년 3월 8일 이승만 정부는 대전에서도 야당 유세에 학생들이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또다시 학생들과 교사들을 위협했다. 이에 고등학생들이 학원 자유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3월 10일에도 대전의 고등학생들은 시위를 이어나갔다. 경찰의 폭력 진압이 한층 강해지면서 시위 참여 학생들의 피해는 더욱 커졌다. 이것이 ‘3·8민주의거’이다.

기어코 1960년 3월 15일 사상최대의 부정선거가 자행됐다. 선거 당일 전국 곳곳에서 시민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특히 마산에서는 밤이 되면서 시위가 더 격렬해졌는데, 이때 경찰이 무장도 하고 있지 않은 시위대에게 총과 최루탄을 무차별 발사했다. 이날의 발포로 8명이 죽고 8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4월 11일에는 마산 앞바다에서 실종되었던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인양됐다.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이 눈에서 뒤통수까지 관통한 상태였다. 김주열의 시체가 옮겨진 병원으로 몰려든 시민들은 참혹한 주검을 확인하고 시위 대열을 형성했다. 이때부터 경찰과 시위대의 공방이 계속되어 4월 13일까지 이어졌다. 1960년 3·15부정선거 직후 마산에서 전개된 이러한 일련의 항거를 ‘3·15의거’라고 부른다.

결국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에 의해 서울에서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됐고, 다음날인 4월 19일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서울, 부산, 광주 등 주요도시에서 벌어졌다. 이승만 정부는 발포 등 가혹한 폭력으로 시위를 진압하여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래서 화요일이었던 이날을 ‘피의 화요일’이라고 부른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했지만 군대의 힘만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4월 25일 교수단시위를 계기로 대규모 시위가 재개되었다. 다음 날인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시민들의 하야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시민의 힘으로 독재자를 끌어내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4·19는 ‘혁명’이 되었다.

4·19혁명 이후에도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되찾으려 한 민주화운동이 끊이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1979년 10월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부마 민주항쟁이다. 부마 민주항쟁은 유신체제 말기 부산대 학생들이 시작한 시위가 부산과 마산 일대로 확산되면서 거대한 시민항쟁으로 발전한 사건이다. 부마 민주항쟁은 며칠 뒤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에게 살해당하는 10·26사건으로 연결됐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사실상 모든 권력을 찬탈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다음 날인 5월 18일 광주의 학생들은 5·17쿠데타와 전두환의 신군부를 규탄하며 시위에 나섰다. 신군부는 공수부대 등 계엄군을 동원해 학생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러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자 시민들도 파출소 등의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시민들의 무장에 당황한 계엄군은 일단 광주 밖으로 빠져나왔다가 5월 27일 새벽 다시 광주로 진입했다. 끝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하고자 한 시민군들은 계엄군과의 교전 끝은 상당수가 희생당했다. 하지만 이후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자 원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의 민주화에 있어 결정적인 계기가 된 1987년 6월 항쟁 때도 4·19혁명 당시 김주열처럼, 물고문 끝에 질식사한 박종철과 최루탄에 피격당한 이한열 등 학생들의 희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분노한 동료 학생들은 1987년 6월 10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6월 항쟁에서 헌신적으로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여기에 ‘넥타이부대’로 상징되는 시민들이 동참하여 함께 싸웠다. 결국 전두환 정부는 ‘6·29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비롯해 당시 학생과 시민들이 강하게 주장하던 민주화 방안을 대폭 수용했다. 덕분에 한국 민주주의는 비록 여전히 한계가 없지 않으나 분명 많은 진전을 이루어냈다.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는 4·19혁명 이후 60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성과물이다. 한국인들은 그동안 많은 노력과 희생을 통해 민주주의의 폭을 넓혀 왔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언제든 다시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19혁명을 비롯한 민주운동 60주년을 맞아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돌아보는 일은, 사회통합과 남북번영까지 포괄해야 하는 내일의 민주주의를 고민할 때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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