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권에 항거했던 고교생들의 함성이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다. 세상을 울렸던 그들의 힘찬 발소리가 여기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도 하다. 1960년 4월혁명으로부터 60년의 세월. 그 세월은 우리 땅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로 열매를 맺고 있지만 또 다른 과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오늘 4·19혁명을 향해 달려갔던 2·28, 3·8, 3·15의 현장에서 주역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대구 남구 명덕역 2번 출구 앞, 옛 2·28민주운동기념탑이 있던 자리를 옛 2·28주역들이 찾았다.

대구 2·28, 옛 기념탑 자리의 추억

2·28민주운동 60주년을 꼭 2주일 남긴 대구. 활발한 모습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열어간 대구의 자존심처럼 느껴졌다(취재는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이뤄졌다).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에서 당시의 주역 홍종흠 사업회 고문(당시 경북고), 여행웅 부회장(당시 경북사대부고), 심재태 선생(당시 대구고)을 만났다. 세 사람은 오랜만에 60년전의 얘기로 빠져들었다.

“2·28민주운동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로 민주화의 횃불을 들어 올린 것을 기록됩니다. 민주주의의 실현을 향해 시작된 첫 시위였습니다. 아무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교생들이 나서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외친 것이지요. 이 일련의 과정은 대구와 대전, 마산, 서울까지 모두 합해 ‘1960년 봄 민주혁명’으로 불리는 게 맞지요.”(홍종흠)

기념회관 인근의 지하철역도 명덕역(2·28민주운동기념회관)으로 2·28을 병기하고 있었다. 이곳은 옛 2·28민주운동기념탑이 있었던 자리다.

세 사람이 거리로 나섰다. 지하철이 지나가는 기둥에 ‘한국 민주혁명의 출발 2·28민주운동’이라고 붙어 있어 지나가는 이들에게 이곳의 오랜 사연을 들려주고 있다. 사거리가 너무 복잡해져 1989년 두류공원으로 기념탑이 옮겨가면서 탑이 있었다는 표지석만 남았지만 이들에게는 영원히 세워져 있는 마음의 탑이다.

“우리 대구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나와 반월당으로 진출했으니 이 네거리를 지나 달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더 의미 있었던 기념탑입니다.”(심재태)

네거리와 기념탑 자리를 지나 회관으로 돌아온 세 사람은 회관 1층에 마련된 전시관 앞에섰다. 횃불을 든 주먹 동상 앞에서 파이팅도 외쳐보고, 남녀학생의 동상을 보며 당시의 기억으로 돌아가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대전 대흥동 대전고 내 3·8민주의거기념비 앞에 선 김용재 공동의장.

대전 3·8, 대전고 교정의 함성

3·8민주의거 현장은 대전시 대흥동의 대전고등학교와 그 일원이다. 아직도 여전한 중앙로와 대전역이 가깝다. 그 자리 그대로 후배들이 공부하고 있는 학교는 예전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학교 바깥으로는 당시의 건물과 골목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해 조금만 기억을 더듬으면 당시의 함성과 친구들과 맞댔던 어깨가 생생하다.

3·8민주의거 기념사업회 김용재 공동의장은 당시 3학년이 졸업한 2학년, 즉 3학년 진입 대기 중인 상황에 의거에 참여했다.

구 정문을 지나면 대운동장과 교사 옆으로 3·8민주의거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재학생들의 이동공간에서 그날의 함성을 들려주고 그 정신을 잇고자 하는 뜻이다.

지난해에는 3·8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기념식을 정부 기념행사로 치르는 감격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 그가 다시 밟은 모교의 의거 현장은 더욱 남다른 듯하다.

김 의장은 3·8의거가 4·19민주혁명으로 이어진 결정적인 징검다리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면서 모교는 물론 우리 사회가 당시 3월과 4월의 의거를 기억하고 우리사회의 민주주의의 소중한 첫발로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다.

경남 창원 마산합포구 서성동 삼거리에 세워진 3·15의거기념탑.

마산 3·15, 총탄 자국 선명한 담벼락

60년 전 3·15의거가 일어났던 그날을 목전에 두고 방문한 마산의 거리는 공기부터 달랐다. 봄을 앞두고 부쩍 따뜻해진 날씨와는 달리 의거의 현장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다소 무거웠다.

3·15추모공원(3·15민주묘지, 마산회원구 위치). 당시 불의에 항거하다 희생된 시민과 학생들, 이후 부상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분들이 잠들어 있는 이곳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유영봉안소 앞에 서면 우측으로 지금의 묘지가 형성되기 전 민주열사들의 묘가 있던 구암동 애기봉이 한 눈에 들어 온다.

60년 전 선열들의 발자취를 따라 당시 민주당 마산시 당사(오동동)를 거쳐 그날의 치열한 투쟁이 전개됐던 무학국민학교(현 무학초등학교)의 담벼락을 찾았다.

부정선거의 개표를 막으려는 학생과 시민을 향해 쏟아졌던 무자비한 총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원래의 담벼락은 한 귀퉁이만 남긴 채 헐렸고, 원래의 위치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총알자국 선명하게 담장이 복원돼 있었다.

이어 찾은 곳은 무학초등학교와 인접한 서성동 삼거리 교차로에 위치한 3·15의거기념탑. 이곳은 당시 가장 많은 시민들이 집결했고 이를 저지하려던 경찰과의 가장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곳이다. 굳센 의지로 전진하려던 학생과 시민의 모습을 형상화한 군상과 높게 솟은 기념탑은 60년 전 그날처럼 굳센 결의를 지키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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