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가유공자 인생기록 프로젝트’에 참여한 참전용사가족과 대덕고등학교 염지희, 김민서, 박소연, 이규빈, 이은빈, 정재빈, 정영훈, 허혁준 학생이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아 참배를 드리고 있다.

할머니와 손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고 작은 액자를 꾸미고 있다. 액자 위로 작은 장식이 올라갈 때마다 행복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은자 어르신(90세, 가명)과 염지희(18세) 학생의 인연은 지난해 여름 시작됐다. 두 사람은 ‘국가유공자 인생기록 프로젝트’를 통해 만났다. 대전지방보훈청과 대전보훈요양원, 대덕고등학교가 함께 하는 이 프로젝트는 6·25참전유공자, 보훈가족과 고등학생을 일대일로 연계해 1년간 매달 만나며 보훈가족의 삶의 기억을 학생들이 기록하고 이를 책으로 남기는 작업까지 진행된다.

6·25참전유공자의 유가족인 어르신은 첫 만남부터 선뜻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런 어르신의 마음의 문을 연 것은 염지희 학생의 정성이었다.

 

염지희 양은 프로젝트를 위해 예정돼 있는 만남의 날 이외에도 따로 시간을 내 고은자 어르신을 찾아뵙고 친할머니를 대하듯 어르신을 대했다. 봄이 되면서 얼어있던 눈이 녹든 어르신의 마음의 빗장도 조금씩 열렸고, 어르신은 조심스럽게 지나온 세월을 더듬어가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지방군단위 시골마을을 고향으로,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어르신은 자신을 장난을 많이 치는 활달한 성격의 소녀로 기억했다. 장난기 많고 활발했던 소녀는 국민 학교 동창인 남편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고은자 어르신은 다행히도 산 속에 위치한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도, 6·25전쟁도, 그 참상을 몸소 겪을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해방 소식을 들었을 때는 뛸 듯이 기뻤고,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슬 퍼런 전장의 소리는 매일 같이 깊은 산골마저도 뒤흔들었고, 어르신의 가족들은 더 깊은 산골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거기에 더불어 매일 전장에 나간 남편의 소식을 기다리며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린 자녀들을 돌봐야했다.

그날의 포탄 소리와 폭격기의 소리가 생생히 떠오르는 듯 잠시 회상에 빠진 어르신의 표정의 어두워지자 염지희 학생은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드리곤 했다. 온기와 함께 해맑은 미소로 어르신의 얘기에 귀 기울이는 염지희 양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어르신의 얼굴도 덩달아 밝아졌다.

몇 번의 만남이 거듭되며 두 사람 사이는 금세 친할머니와 친손녀처럼 돈독해졌다. 함께 부채도 만들고, 액자도 꾸미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어느덧 두 사람은 서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됐다. 고은자 어르신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염지희 학생을 지긋하게 바라보는 눈빛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어르신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 온 인생의 반려자를 잃고 상실감에 많이도 울었고, 혼자 힘으로 자녀를 키우며 고생도 많이 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염지희 학생도 덩달아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렇게 어르신의 삶의 궤적은 염지희 학생에게로 이어졌다.

염지희 학생은 2018년 한 학년 위의 선배들이 먼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만든 다른 유공자의 자서전을 읽고는 크게 감명받아 적극적으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이 기회를 통해 국가유공자와 보훈가족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고, 국가유공자 덕분에 우리나라가 존재할 수 있음을 제대로 깨닫고 또 감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국가유공자 인생기록 프로젝트를 통해 교과서로는 배울 수 없었던 살아있는 역사를 알게 되었고, 저 스스로 애국심과 보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어요. 국가유공자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고 제가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미래를 꿈꿀 수 있음에 제대로 감사하는 마음도 갖게 됐습니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염지희 학생은 수줍어 하면서도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인재가 되겠다’는 다부진 포부를 밝히며 ‘국가유공자 인생기록 프로젝트’를 즐겁게 되돌아 봤다.

“국가유공자분들과 그 가족분들의 삶을 글로 남김으로써 그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과 도움이 되기를, 또한 국가유공자의 삶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선배들을 보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처럼 그 역시 후배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는 선배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어린 소녀의 당찬 소망이 이루어지길, 함께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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