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천전투 등 낙동강 방어전 기간 중 대구
에서 투입되는 신병들을 환송하는 시민들.
<사진:국방일보>
 

영천전투는 6·25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세를 되돌려 아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며 극적으로 나라를 구해낸 전투다. 국군은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통해 영천을 확보했다. 이 전투는 낙동강 전선에서 밀리면 더 이상 버텨내기 어려울 위기에서 최후의 반격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우리 전사에 중요한 전투로 꼽힌다. 실제로 아군은 이 전투를 이겨내며 반격의 힘을 추스르고 전력을 가다듬어 다시 북진에 북진을 거듭할 수 있었다.

적 제2군단은 1950년 8월 공세에서 구미 - 다부동 - 대구 축선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자 8월 20일 다부동 방면의 공격에 실패한 예하의 제15사단을 영천 동북방 입암리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배속된 제73독립연대, 제103치안연대와 함께 전차 12대와 각종 포 166문의 지원을 받아 최후 공세를 준비했다.

적 제15사단은 영천을 점령한 후 대구나 경주로 진격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3개 연대 병진 공격을 전개했다.
이에 대해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8사단은 보현산과 입암리 선에서 9월2일까지 적을 저지하고 9월4일 기룡산 일대로 철수해 서로부터 제21연대, 제16연대, 제7사단 제5연대를 배치했다. 제21연대와 제16연대 사이의 공백지대에는 제7사단 제3연대 제1대대를 배치해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3일간의 대회전에서 승리

▲ 1950년 9월 영천전투 승리 직후 8사단
21연대 장교들이 파괴된 북한군 T-34 전차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사진:국방일보>
영천에 대한 본격적인 점령전은 9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에 걸쳐 3회의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대부분의 전투는 주로 영천 북쪽과 남쪽 일대에서 이뤄졌다. 영천 북쪽에 배치된 제21연대는 적 2개 연대의 공격을 저지 견제했다.

제19연대는 적 후방부대와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영천 남쪽의 진지를 점령한 제5연대와 제10연대는 적의 남침을 저지하고 적 제15사단을 압박했다. 이로써 국군은 북쪽 선천리의 제21연대로부터 남쪽 아화리의 제 5연대까지 낚시바늘 모양의 포위망을 형성했다.

이어 9월 10일 영천-경주간 도로 남쪽에서 반격을 시작한 국군은 9월 13일 구전동-자천동-삼매동북방-인구동남쪽을 연결하는 9월 공세 이전의 제8사단 주저항선을 회복했다. 이로 인해 적 제12사단과 제8사단은 후방과 측면을 위협받게 됐고, 결과적으로 적 제8사단은 진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영천은 대구와 포항의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로, 적이 영천을 점령할 경우 국군 제1군단과 2군단의 분리뿐 아니라 아군 유일의 동서보급로가 차단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적이 대구 방면으로 진출하면 왜관과 다부동 일대의 국군과 미군 방어선의 후방이 차단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붕괴될 수 있고, 적이 경주 방면으로 진출해 제12사단과 제15사단이 합세할 경우 부산에 이르는 통로가 개방돼 부산교두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영천을 점령하고 경주 방면으로 진출을 기도한 적 제2군단에 맞서 국군은 제8사단은 물론 새로 편성된 제7사단의 3개 연대, 제1사단과 제6사단에서 차출한 2개 연대를 투입해 방어조치를 취하는 등 육군본부와 군단의 시의적절한 조치로 위기를 극복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고수할 수 있었다.

‘한국 포기’ 미국, 생각 바꾸다
아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전환점이 된 영천지구 전투는 적 제15사단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전선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적이 예정한 작전계획의 골간을 분쇄하고 전략의 근본방침을 뒤엎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 나아가 적이 낙동강 방어선 돌파에 총력을 경주함으로써 작전한계점에 도달할 정도로 모든 전력을 소모하도록 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가능성을 더욱 높였다는 것이다.

특히 영천이 돌파되고 위기가 가중될 경우 미국은 한국을 포기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었다. 당시 미 합참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를 포함해 62만 명을 미국령 사모아도에 재배치, 신한국을 창설하겠다는 계획을 승인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영천전투의 승전은 대한민국을 백척간두에서 세운 전투로 평가받아 마땅한 전투인 셈이다.

영천전투를 기억하라 ‘메모리얼 파크’ 기공

영천전투의 희생과 의미를 기리기 위한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 기공식이 지난 13일 경북 영천시민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기공식에는 김영석 영천시장, 주낙영 경상북도 행정부지사, 정원미 경주보훈지청장 영천대첩참전전우회와 보훈단체 회원 등 700여명이 참석했다.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 조성사업은 6·25 전쟁 당시 북진 발판의 계기를 마련한 영천전투(영천대첩)를 재평가하고 참전 용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한편 호국안보의식 제고 등을 위해 추진되는 것이다.
이 사업은 영천호국원이 위치한 고경면 청정리(544-2번지)일원과 교촌동 창구동 일원 12만649㎡(약3만6,500평)부지에 국비 등 총 사업비 304억원을 투입, 추모권역과 체험권역으로 나눠 조성된다.
추모권역은 국립영천호국원 인근 고경면 청정리 일원에 영천호국기념관, 기억의 연못, 염원의 마당을 조성하게 되며, 체험권역에는 영천전투전망타워, 영천시가전 체험장, 충혼탑 주변정비 사업 등이 추진된다.
이날 기공식에서 김영석 영천시장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호국안보의식 제고와 참전용사 및 보훈가족들에게는 자긍심을 심어 줄 이번 영천전투메모리얼파크 조성사업이 호국도시 영천의 이미지를 각인시킴과 동시에 영천의 문화관광 산업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나라사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