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올해,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가진 기념일을 맞는다. 올해로 90주년을 맞는 학생독립운동일이다. 1919년 뜨거웠던 3·1운동의 열기와 임시정부 수립을 통한 민족독립 투쟁의 불길을 올린지 10년, 1929년 학생독립운동이 새롭게 대열에 가세하면서 독립투쟁의 역사를 새롭게 쓰기 시작했다.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3대 독립운동으로 평가받는 학생독립운동의 전개과정과 의의를 정리한다.

일제의 식민교육은 일본제국주의 우리 민족 침탈을 위한 핵심 전략 중의 하나였다. 학교교육을 장악해 식민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은 식민지 국민으로 순치하여 일제의 식민지배를 영구히 정착시켜 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식민교육은 식민지 노예를 만들기 위한 교육이면서, 한일 학생 간의 차별을 극대화해 우리 학생들의 자존심을 꺾고 열등감을 조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식민의식을 심어 식민지 경영의 도구로 교육을 활용하기 위한 악랄한 지배전략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교육현장인 학교는 식민지 현실의 모순을 가장 정확하게 노출하는 곳이었고, 학생은 그 현장에서 온몸으로 모순을 느끼며 분노하게 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특히 학교는 학생들이 함께 느끼는 일제의 폭압적 식민지 교육에 대해 함께 분노하고 표현하며 증폭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공간이었다.

3·1운동 이후 학생들의 분노는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가며 그 출구를 찾고 있었고, 마침내 1929년 광주와 나주에서 불길이 터져 올랐던 것이다.

당시 시위를 보도한 신문 기사.

전개과정, 광주-나주 통학열차의 충돌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 학생들과 일본인 광주중학생들의 충돌이 벌어졌다. 겉보기에는 일본 학생들의 도발에 의한 우발적 충돌이었지만 그 내용은 사실 당시의 시대상황과 관련해 준비됐던 투쟁이었으며, 대일 독립투쟁의 흐름의 중요한 축으로 이어지는 투쟁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은 3·1운동 이후 소위 기만적 문화정책을 펼치던 일제에 항거한 것이며, 1929년부터 시작된 세계적 대공황, 1920년대 들어 크게 성장한 노동·농민·학생운동의 성장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일어난 필연적 항일투쟁이었다.

당시의 학생독립운동을 주동했던 중심에는 학생비밀 결사조직이 있었다.

대표적인 조직인 성진회는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보통학교 학생들이 제안해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보생 최규창의 하숙집에서 2개 학교 15명이 모여 결정한 단체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지배와 차별교육에 저항하는 민족의식으로 무장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 사상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모임이었다. 이들은 △일제의 굴레에서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자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절대 반대한다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요구한다 등의 강령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독서회중앙회는 1929년 6월 도쿄에서 유학중이던 장재성이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와 광주고보, 광주사범, 광주농고 학생들과 함께 양림동에서 결성된 단체. 장재성은 1928년 광주고보 맹휴 때도 깊숙이 관련하는 등 광주에서의 조직운동을 치밀하게 펼치고 있었다.

1920년대 독립운동의 대미를 장식하는 학생독립운동은 이렇게 광주지역 2개 학생 비밀결사에 의해 준비됐고, 추진됐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기반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구 나주역 광장, 학생독립운동 때 외쳤던 구호가 바닥에 새겨져 있다.

시위의 확산 - 광주에서 방방곡곡으로

11월 3일의 1차 시위는 명치절이자 음력 10월 3일로 민족 최대 기념일인 개천절에 시작됐다. 전달 30일의 한일 학생들의 충돌 여진이 남아있는 가운데, 명치절 기념식에 참석한 광주고보 학생들은 일본국가인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하고 침묵으로 저항했다. 식후 광주 시내로 나선 학생들은 감시하던 교사들과 충돌하고, 일제 기관지 노릇을 하던 광주일보로 달려가 편파보도를 규탄하고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기도 했다.

광주역에서는 통학생들과 일본학생들과의 대규모 충돌이 이어졌고 시위사태는 시내로 확산됐다. 오후에 다시 시내로 진출한 각 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이어지자 시민들도 지원하며 학생들의 사기를 높였다.

당시 신문들은 이날의 시위에 참여한 학생 시민이 3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했고, 다음날은 광주고보와 광주중학교에 3일간의 휴교령이 내려졌다. 신문들은 이날의 시위를 10년 전 3·1운동 이후 처음 보는 큰 사건이라며 보도를 이어갔다.

다음날부터 검거선풍이 불어 일제는 60여 명의 학생을 검거 구속해 검사국으로 송치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신간회와 조선청년총동맹 등 사회단체들은 광주를 찾아 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사이에 광주는 2차 시위를 위한 준비를 마쳤다. 결전의 날인 12일 1,000여 장의 인쇄물을 나눠 가진 학생 지도부는 학교별로 9시 첫 수업과 함께 수업을 거부하고 시내로 모여들어 시위를 했다. 시위대는 1차 시위 때 체포된 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광주형무소를 목표로 모여들었고 경찰과의 대치가 계속됐다.

곳곳에서 벌어진 2차 시위 후 광주의 모든 한국인 중등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무차별 검거선풍이 불었다. 수백 명씩의 검거가 이어졌고 결국 비밀결사가 탄로 나면서 구속자도 2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는 광주지역 중등학교 학생 수의 20%에 달하는 숫자였다.

다음 차례는 학생독립운동의 전국 확산이다.

노예교육, 식민지교육을 거부하며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열망하는 학생들의 투쟁열기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보도 통제가 있었지만 인편으로 소식을 전달받은 전남지역으로 가장 먼저 시위가 확산됐다. 목포, 나주, 영산포, 송정리, 함평, 강진, 창평, 여수, 담양, 보성, 순천의 각급학교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서울에서는 조선청년총연맹, 중앙청년동맹,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근우회, 신간회, 천도교 등 종교단체에서부터 언론계로 불길이 옮겨 붙었다.

학생들과 청년사회단체가 주도한 시위는 12월 2차 대규모의 동맹휴학, 항의집회,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방학으로 다소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시위는 다음해 더욱 폭발적으로 벌어져 30여 개교에서 3,000여 명이 넘는 학생이 참여한 제2차 시위가 전개됐다.

이렇게 서울에서 이뤄진 시위를 계기로 민족독립을 위한 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돼 1930년 1월 중순부터는 도시 뿐만 아니라 읍면 단위로 이어지고, 참여 학교도 중등학교 외에 보통학교 학생까지 확대됐다. 투쟁의 양상 역시 시험거부, 백지동맹, 동맹휴학, 격문살포, 교내 및 가두 시위 등의 다양한 방식이 동원됐다.

당시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학교는 194개교, 참가 학생 수는 5만4,000명으로 집계됐다. 당시 전체학생의 절반에 가까운 수치이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피해는 퇴학 582명, 무기정학 2,330명, 강제전학 298명, 검거 1,600여 명에 이르렀다.

학생독립운동의 의미와 역할

광주 북구 누문동의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광주학생운동 직후 1930년과 1931년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함께 노동자 파업이나 농민 소작쟁의가 폭발적으로 늘었고 그 참가인원도 크게 늘었다. 이는 학생독립운동이 항일민족운동의 전 부문으로 투쟁력을 고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30년대 중반 일본의 대륙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식민지 전시동원체제로 재편되고 일제의 탄압이 극에 이르지만 투쟁의 경험을 가진 학생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반제, 반일 비밀결사의 형태로 일제에 저항했다. 이들은 1940년대 들어서도 일제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을 확신하면서 무장투쟁으로 나서거나 독립을 준비하면서 실력 양성에 진력했다.

일제 강점기 학생독립운동에 나섰던 학생들은 스스로 독립운동의 중요한 동력이 되면서 다른 한편으로 지속적으로 투쟁의 역량을 보충하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저항하는 학생독립운동과 그 주체 학생들로 인해 일제 말기의 독립운동은 그 면면한 맥을 잇게 되고, 그들은 독립의 순간 민족의 운명을 짊어진 역군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학생운동의 그 순수한 열정과 민족정신은 해방이후 해방 공간과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며 우리 민주주의 성장에 커다란 자양분이 됐다.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맞선 4·19혁명, 이어 광주민주화운동과 80년대 민주화 과정 전체에서 그들은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참고자료 : 광주학생독립운동사, 광주학생독립운동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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