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높고 푸르른 가운데 남도에도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3·1운동의 함성이 100년을 지나가는 오늘 한반도 남쪽에 남은 ‘100년의 기억’을 찾았다. 그날의 함성은 오늘 한반도 평화를 뿌리내리고 있다.

# 양양 만세고개

강원도 양양지역에서는 1919년 4월 4일 양양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이 시작돼 7일간 계속됐다. 그 진원지는 만세고개. 3월 양양면 임천리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지도자 22명이 체포되고 태극기 374장이 압수되자 자연스럽게 장날의 봉기로 이어졌다.

4월 4일 첫날부터 1,500여 명의 참가자들은 대한독립만세 우렁찬 함성을 쏟아냈다. 이들은 양양경찰서를 포위하고 체포된 애국지사를 탈출시키려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총탄에 맞아 3명이 순국했다. 다음날은 각 면단위에서 500여 명씩의 만세운동이 이어졌다.

격렬했던 만세운동의 현장은 광복 이후 자연스럽게 ‘만세고개’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는 태극기를 새겨 넣은 기미만세운동유적비가 세워졌고, 인근 지역은 당시 순국하거나 부상을 입은 이들의 명단을 새겨 만세운동 유적지로 조성됐다.

동해안 7번국도변 28휴게소 인근에서 만나는 유적비에는 만세를 부르는 주민들의 다양하고 모습들이 생생하다. 100년 전의 함성이 새겨진 조형물과 이들의 뜻을 담은 대형 태극기는 오늘도 공원 전체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

군산 3·1운동역사공원의 옛 구암교회

# 군산 구암동산

옛 군산 구암동산에는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구암교회, 구암예수병원 등이 자리했고 있었다. 영명학교 학생 일부를 주축으로 만세운동이 준비됐다. 그러나 만세운동으로 계획됐던 3월 6일 장날 하루 전 이를 눈치 챈 일경에 주동자들이 연행되는 상황이 벌여졌다.

이에 동료 교사와 학생 대표들이 주저하지 않고 ‘오늘 시위를 벌이자’며 행동에 나섰고 여기에 멜본딘여학교 학생과 소식을 들은 구암교회 신도, 예수병원 직원까지 가세했다.

이를 시작으로 공립 보통학교 방화 항일운동 등 만세운동이 확산됐고, 이후 전주, 정읍, 익산, 임실, 광주, 목포 등 다른 호남지방의 항일활동으로 이어졌다.

호남 항일운동의 발상지인가 된 구암동산은 군산3·1운동역사공원(구암역사공원)으로 단장돼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옛 구암교회 건물은 ‘3·1운동 역사영상관’으로 탈바꿈해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었으며, 옛 영명학교 모습을 본 따 새로 지은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이 보였다. 기념관 뒤편 계단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한강이남 최초의 3·1운동 발상지’라고 적힌 충혼상징 조형물이 우뚝 솟아 당시의 기상을 드러내고 있다.

광주제일고 교정 내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 광주 수피아여학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수피아여학교>는 광주 만세운동을 하루 앞둔 9일 밤, 기숙사였던 수피아홀 지하예배당에서 학생들이 모여 고종 황제 장례식날 입었던 치마를 뜯어 밤새 태극기를 만들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10일 아침,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양림교와 광주천변을 거쳐 부동교로 향하며 만세를 외쳤고, 소식을 접한 숭일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 기독교인들, 주민 등 1,000여 명이 넘는 인파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목놓아 외쳤다.

여학생들이 밤새 태극기를 만들었던 수피아홀은 원형 그대로 남아 ‘수피아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 준비지’이자 역사관으로, 일부는 여전히 학생들이 이용하는 교실로 이용되고 있다. 책상에 앉아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들의 얼굴 위로 목이 터지도록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선배 선열들이 겹쳐 보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학생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 중 하나로 우리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발생한 한·일 학생들의 충돌은 광주 학생들을 자극했고,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전국으로 확산됐다.

광주제일고 경내에 있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2005년 화정동으로 이전해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기념관 우측으로 11월 3일을 의미하는 113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횃불 모양의 기념탑을 만날 수 있다.

안동 임청각.

# 11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안동 임청각

임청각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로, 선생의 동생, 아들, 조카, 손자, 손부, 당숙에 이르기까지 11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역사적인 장소다.

일제 강점기 중앙선 철도 부설로 99칸의 가옥이 절반으로 잘려나가 현재는 60여 칸이 남아 있다. 그것은 독립운동의 ‘맥’을 끊겠다는 일제의 간악한 의도이기도 했다. 임청각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뒤로는 영남산이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

대구 3·1운동길.

# 다시 살아나는 역사의 현장, 대구 3·1운동만세길

대구의 독립운동 현장은 중구 남성로 약전골목과 계산오거리를 기점으로 3·1운동만세길, 제일교회, 이상화 선생 고택, 서상화 선생 고택 등으로 이어진다.

“조선독립만세!” 그날의 함성이 울려 퍼졌던 약전골목의 입구로 들어서서 천천히 걷다보면 100년간 대구제일교회로 쓰였던 대구기독역사관을 볼 수 있다. 당시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의 주도로 서문장터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인근의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등의 학생과 교사, 기독교인 참여했고 남성로와 동성로를 넘어 대구 전역으로 확산됐다.

이어 계산오거리에서 길을 건너면 대구 제일교회 옆으로 90개의 계단으로 이뤄진 ‘3·1운동만세길’이 드러난다. 1919년 3월 8일 대구 만세운동에 동참하기로 한 계성학교 학생들이 집결지로 이동했던 지름길이다. 당시 이 길 주변은 숲이 울창해 학생들이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현장으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대구 독립운동의 현장은 최근 ‘근대골목투어’로 명성을 얻어 남녀노소, 외국인들까지도 즐겨찾는 역사적 장소가 됐다.

부산 최초 근대적 여성 교육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성지인 부산진일신여학교.

# 부산, 수천 명이 모여 독립의 등불을 밝히다.

서울에서 3월 1일 일어난 독립운동의 불길은 3월 11일 부산으로 전달됐고, 그 시작에는 부산진일신여학교가 있었다.

<부산진일신여학교> 부산의 최초 근대 여성 교육시설이기도 한 이곳에서 11일 밤 교사 박시연과 학생 11명이 태극기를 들고 길거리로 나갔다. 주동자들은 다음 날 곧바로 체포됐지만, 그들이 놓은 불길은 바로 사방으로 번지며 부산 전역으로 확산됐다.

부산 좌천동에 위치한 부산진일신여학교 자리에는 지금도 1905년 지어진 근대식 건물이 그대로 100년 전 3·1운동 자료와 신교육을 받던 여학생들의 생활상 등을 전시하는 기념관으로 남아있다.

<구포만세길>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퍼트린 불씨는 구포장터에서 폭발적으로 커졌다. 당시 부산의 대표적인 오일 장이 열리면 인근 지역의 노동자, 농민, 상인 등 수천 명의 인파가 몰리는 곳이었다. 장날인 3월 29일을 기해 모여있던 인파의 만세소리는 순식간에 부산 전역으로 번져나갔고, 경찰은 주동자 11명을 주재소(현 구포1치안센터)로 연행했고, 분노한 상인들은 주재소로 달려가 경찰과 충돌하기도 했다.

당시 현장이었던 구포역 앞의 구포제1파출소부터 구포시장통, 대리천 복개도로까지 800m에 이르는 거리는 1995년 구포만세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만세길 양 옆은 상시 태극기가 휘날리면서 당시 만세운동의 전개양상을 알리고 있다.

제주시 구좌읍 해녀항일운동기념탑.

# 제주 조천만세동산과 해녀항일운동

<조천만세동산>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올레 19길이 시작되는 곳, 이곳에서 우리는 100년 전 제주 지역 만세운동의 중심지 조천만세동산을 만난다. 가을 장마와 햇빛이 번갈아 드나드는 이곳에서는 당시의 만세 함성이 바닷가의 파도에 섞여 들리는 듯하다.

너른 평야에 해발 20여 미터나 될까한 작은 동산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시작된 지 꼭 20일 만인 3월 21일,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은 4일간 계속된다. 미밋동산으로 불리는 작은 동산의 함성은 펼쳐진 들판을 가로 질러 인근 작은 마을로까지 연결됐다. 1차 500여 명이 참여했던 만세운동은 4차 오일장을 기해 1,5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만세동산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야트막한 정상에 3·1독립기념탑을 세워 당시를 기념하고 있다. 탑은 태극기를 든 소박한 모습의 농민이 장터를 행진하는 동상을 안고 있다. 동산과 주변은 제주항일기념관으로 조성됐다. 기념관과 함께 위패봉안실인 창열사, 애국선열추모탑 등이 세워져 남도 제주의 독립운동을 기리고 있다.

제주의 항일운동은 일상 투쟁으로 이어졌고, 제주도 전역에 걸친 일제의 폭압적인 군사기지화가 진행됐지만 해방은 다시 제주를 살아있는 역사로 복원시켰다.

<제주해녀항일운동> 제주하면 돌하르방 바람 등과 함께 떠오르는 해녀. 그이들의 항일운동은 제주도의 3대 항일운동의 하나로 꼽힌다.

해녀의 생존권을 침해하는 일제와 해녀조합에 맞선 항일운동은 여성 집단 최대 규모의 어민투쟁이자 1930년대 최대의 항일운동으로 꼽힌다.

1931년 6월부터 1932년 구좌, 성산, 우도 일대에서 봉기했던 이들은 일본인들이 해산물을 시가보다 턱없이 낮은 가격에 매입하려 한데 반발해, 항의서 제출에 이어 주재소 앞에서 호미와 비창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해녀 대표들이 담판을 벌여 요구조건을 관철시켰지만 이 과정에서 운동을 주도했던 부덕량 선생은 일제의 민족운동가 체포와 맞물려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현재 제주 동북쪽 구좌읍에는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이, 우도 선착장 인근에는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가 각각 세워져 있다. 기념탑과 기념비에는 당시의 슬픔을 노래했던 ‘해녀의 노래’를 새겨, 당시의 처참했던 노동환경과 그 환경을 뚫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불살랐던 이들을 기억하고 있다.

구좌 기념탑 광장에는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세분의 흉상이,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하고 일제의 침탈에 항의했던 표정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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