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은 1904년 신지식인을 길러내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고, 황해도에서 교육 구국운동에 힘을 쏟았다.

또한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해 학무총감에 추대돼 각 군을 돌며 계몽운동을 펼쳤다. 1910년 선생은 신민회에 가입해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일제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다 1915년 가출옥됐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가 “임정의 문지기를 하겠소”라고 요청했고 경무국장에 임명돼 일제가 보내는 첩자들을 가려내 처단하고, 정부요인들과 동포들의 안정을 지켜내는 일을 수행했다.

선생은 1931년 임시정부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을 맡아 이봉창이 일왕을 처단하고, 이덕주와 유진식이 조선총독을 처단하고, 유상근과 최흥식이 관동군사령관을 처단할 것을 지휘했다.

이후 선생은 중국의 장제스 총통을 만나 한인청년을 장교로 길러내는 길을 열고, 장교 양성에 주력했다.

1940년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집행위원장, 광복군 통수권자,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으로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활약했다. 1945년 11월 환국 후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애쓰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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