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말살정책에 맞서다 일제의 경제적 수탈은 한민족 말살 획책으로 이어졌다.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어놓고 각급학교 학생들을 동원 강제 참배하도록 하고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도록 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다음 프랑스형 식민지 지배 방식인 동화주의를 모방해 사회경제적 수탈을 자행함은 물론 한민족 말살까지 획책했다. 그들은 열강 국가의 보편적 식민지 지배 형태인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에만 머물지 않았다. 나아가 피지배 민족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한민족 말살을 기도한 것이다. 이는 그들의 한국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궁극적이고 최종적 목표였다.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는 간접지배 방식을 택하거나 피지배 민족의 구성과 문화를 보전해 주려 했던 다른 열강의 지배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수한 방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한국 통치 방식은 세계 제국주의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잔혹한 형태였다. 경술국치 직후 단순히 자기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집에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 죄가 되어 일본 경찰에게 심하게 구타당한 사례는 일제의 한민족말살의 폭압적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같은 상황에 따라 한민족의 위기의식이 크게 높아졌고, 1920년대 후반부터는 신문과 잡지 등에 조선어문과 조선사 등 민족문화에 대한 내용이 민족보전 차원에서 주요 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1920년대 이래 민족문화를 재인식하게 된 것은 일제의 문화정치란 미명하에 자행되던 민족 말살정책에 대한 대응이었다. 국학운동을 바탕으로 한 문화투쟁은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의 주요 방법론이 됐다.

 1927년 좌우익 세력이 합작한 민족운동단체 신간회는 일제가 문화정책으로 전환하던 시기에 구성돼 전국의 지회 등을 두며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신간회 강령 및 규약..
신간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이상재 선생 장례행렬.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

한말의 국학 연구는 근대로의 이행과 자주권의 수호를 위한 방법론으로 역사성과 시대성을 띠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한말 계몽주의 역사학은 일본의 식민사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오류도 범했으나, 한말의 국학은 이념적으로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발하며 전개됐다.

신채호는 한말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라고 말하며, 존화사관과 사대사관에 빠져 우리 역사를 왜소하게 만든 전통사가와,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역사가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저술한 <독사신론(讀史新論)>(1908)은 민족주의 역사학을 정립한 논문으로 높이 평가된다. 이는 국학민족주의에 입각해 근대적 역사연구 방법론 뿐 아니라, 매우 진보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박은식, 한국통사.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그러나 1910년대의 민족사학은 대종교의 신교사관에 영향을 받은 박은식과 신채호 등 대종교도 학자들이 이끌며 암흑기를 헤쳐 나갔다. 이 시기의 역사인식은 박은식의 <명림답부전>과 <발해태조건국지>의 말미에 수록되어 있는 ‘역사가(歷史歌)’에 잘 나타나 있다. 국외에서는 신채호, 이상룡, 류인식 등의 역사연구가 진행됐다. 국내에서는 황의돈과 장도빈 등이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연구를 진행했고, 최남선의 조선광문회가 고전을 복간하며 민족문화를 지키기에 노력했다.

3·1운동은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큰 희망이 되었음은 물론, 역사인식에서도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러나 3·1운동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했다. 겉으로는 강압적 통치를 완화한 것 같았지만, 고등의 기만적 술책을 동원해 사실상 식민지 통치를 강화해 나갔다.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그 일환으로 경성제국대학 교수와 조선사편수회 소속 연구자를 동원해 침략사학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연구하고 한민족에게 왜곡된 역사를 강요하기에 광분했다. 1920년대에는 조선사학회 등 식민지 권력을 배경으로 한 일본인의 한국사 연구 학회가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어져 일제의 식민사학을 주도해 나갔다.

이에 대응해 민족주의 사학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신채호는 국외에서 정력적으로 역사를 집필했고, 국내 신문에 연재한 논문들이 <조선사연구초>(1929)로 간행됐다. 박은식은 <한국통사>(1915)에 이어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을 저술하며 3·1운동의 저력을 역사서술로 정리했다.

국내에서는 황의돈·장도빈·남궁억·권덕규·최남선 등이 통사를 저술했고, 이능화와 안확은 분류사를 저술했다. 최남선은 1927년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다. 비록 그 나름대로는 일제 관변학자에 맞서 단군과 발해의 역사를 지키고자 노력했으나, 실제로 식민지 권력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민족사학의 분화 발전

1930년대는 정신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일제에 대한 반발로 민족의식의 폭과 심도가 한층 확대 심화된 시기였다. 1930년대 전반기에 문화와 학계가 정비·발전되고 있다는 점은 이 시기의 특징적 양상이다. 그 가운데 국어학, 국문학, 역사학은 국학민족주의에 기초한 문화운동의 핵심적 분야였다.

문화운동은 한민족말살을 획책한 일제 식민통치에 대항하여 민족보전을 추구한 것이었다. 이 운동은 정치투쟁이 좌절되자 그 한계를 경험한 독립운동계가 문화투쟁으로 노선을 전환한 것임을 감안할 때 독립운동의 일환이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 사례는 안재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신간회 해소를 반대했고, 해소 직후 새로운 민중적 표현단체와 결사체의 조직을 주장했다. 결국 그는 정치투쟁에 절망해 역사 연구로 민족운동의 방향을 선회하고 조선학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다.

다산 서거 99주기 기념강연회에서 정인보와 안재홍이 ‘조선학’을 주창했다. 곧 ‘동아일보’가 백남운, 안재홍, 현상윤 등을 탐방해 조선학의 개념 등을 대담한 기사를 연속 게재한 데에서 당시 세간의 관심을 알 수 있다. 1934년을 전후한 조선학운동은 이 같은 문화운동의 차원에서 주창된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실체적 양상이 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화운동의 역사적 평가에 소극적이었던 학계의 경향으로 인해 독립운동사에서 간과되거나, 간략하게 논급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학운동은 운동사가 아니라 학술사적으로 접근하고 조명돼야 할 ‘조선연구의 기운’이었다.

1930년대 한국사학의 전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민족사학의 유형이 분화·발전한다는 점이다. 즉 역사연구방법론으로서 사회경제사학과 실증사학이 새롭게 도입, 전개됐던 것이다. 사회경제사학에서는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상>(1937)이 대표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사회경제사학은 일제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을 극복했고, 또한 새로운 역사연구방법론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사가 기준이 된 유물사관 공식만을 유일한 과학적 방법으로 여기는 배타적 태도로 이를 무리하게 한국사에 대입시켜 다원성을 무시함으로써 공식주의로 비판받을 소지를 안고 있다. 한편 1934년 이병도 등이 진단학회를 창립하며 실증사학을 선도해 나갔다. ‘랑케류의 실증사학자’들은 민족주의 사학자와 같은 민족적 성격의 역사서술은 거의 없고 다만 식민지 통치하에서 민족사를 연구하는 것 자체를 민족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그대로의 역사를 규명하려 한 실증사학이 과연 당시 민족이 처한 상황에서 어떠한 도움을 주었는가라는 역사의 효용성과 교훈성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조선어학회 지도자들.

한국독립운동의 특징, 국학운동

심훈, 그날이 오면-검열.

국학민족주의에 포함되어 있는 어문 민족주의와 역사 민족주의는 운동성과 실천성을 지닌 강렬한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따라서 국학자들은 학자이면서, 독립운동가였다. 학자의 길만을 고집하다가 훼절한 인사도 있었으나, 많은 국학자들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요구되는 시대적 의무와 민족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했다. 그들은 혹독한 상황에서 한글맞춤법을 제정하고 국어사전을 만들었으며 한글보급운동을 펼쳤다. 또한 문학사와 소설사 등을 정리하고, 저항문학을 발달시켰으며 출판법과 신문지법 등 식민지 악법을 폐지하기 위한 투쟁에도 나섰다. 국내외에서는 계속해 역사연구와 독립투쟁을 병행해 나갔다. 요컨대 일제 강점기 어문과 역사 민족주의를 통해 민족을 보전하고자 한 국학운동이 지닌 특징과 한계는 그 상대적 조건인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관련해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한국독립운동의 특징적 현상은 무장투쟁 못지않게 우리의 어문과 역사를 지키기 위한 문화투쟁도 중요한 방법론으로 인식돼야 한다. 이를 국학운동이라고 하며, 그 중심에는 국학민족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수많은 국학자들이 국내외에서 국학 연구와 독립투쟁을 병행하였던 것은 국학민족주의의 발로이며, 한국독립운동의 이론이 심오하고 투쟁양상이 다양한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박걸순 / 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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