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작쟁의와 미곡 반출 용천소작쟁의는 1925년부터 1932년까지 평북 용천 불이서선농장 소작농민들이 벌인 대표적 소작농민항쟁이다. 사진은 평북도청 앞에서 연좌 농성하는 용천소작쟁의 대표들. 

농민운동은 독립운동인가

일제강점기 농민의 투쟁은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한국민족의 절대다수는 농민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침략의 가장 큰 이유는 경제수탈에 있었다. 한국을 일본 자본주의의 항구적인 식량 및 원료 공급 기지로 삼는 것이다. 개항이후 일제는 유통과정의 지배를 통해, 을사늑약 이후에는 생산과정의 지배를 통해 싼 값으로 미곡과 면화·잠견 등 원료 농산물을 수탈했다.

이에 맞서 농민은 한말부터 반일 동학농민전쟁을 일으켰고, 또 의병전쟁에 가담하여 항일의지를 불태웠다. 처음부터 농민운동은 독립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전개된 것이다.

경술국치 이후 농민운동은 한말 항일투쟁의 전통을 계승하여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농민은 일제의 식민지배와 수탈제제인 식민지 지주제에 맞서 소작쟁의를 비롯해 수리조합·조선농회·산업조합 반대운동 그리고 화전민 항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했다.

특히 3·1운동으로 민족의식이 고양되고, 노농계급의 세계관으로 사회주의가 수용되면서 농민운동은 더욱 고조됐다. 따라서 1920년대 이후에는 국내 항일투쟁의 중심으로 학생운동과 농민운동이 우뚝 서게 됐고, 농민운동이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이다.

1920년대 농민운동의 전개

농민운동은 주체적 역량과 객관적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 일제강점기 농민운동도 농민의 역량, 즉 농민의식의 성장과 그에 기초한 운동조직이 이끌어 갔다. 다른 한편으로 일제의 식민농업 정책과 그에 따른 생활상의 문제, 곧 객관적 조건이 농민을 운동전선으로 내몰았다.

일제는 1910년대 조선토지조사사업,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초반에 걸친 산미증식계획, 1930년대 중반의 농촌진흥운동, 이후의 조선증미계획 등의 식민농업 정책을 실시했다. 이 같은 농업정책의 기조는 식민지 지주제의 구축과 그를 통한 농업수탈의 감행이었다.

일본으로 반출되는 미곡.

산미증식계획은 토지개량과 농사개량에 의한 미곡 증식과 그 증식미의 일본 반출이었다. 그러나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시행된 제1차 산미증식계획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민간자본 유치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의 산업자본은 산미증식계획과 같은 장기투자보다는 주로 경공업과 식료품 공업에 투입됐고, 한국인과 일본인 지주의 자본도 토지개량보다는 농지를 더 구입하는데 투입된 탓이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1926년부터 관(官) 주도의 제2차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했다. 제2차 산미증식계획의 특징은 제1차에 비하여 사업자금 면에서 민간자본의 비중이 대폭 낮아진 점에 있었다. 이는 민간자본 유치에 실패한 일제가 관 주도로 제2차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한 것이고, 또 그 만큼 수탈적 성격도 강화된 것이다.

옥구소작쟁의 보도기사 

1920년대 지속성과 투쟁성을 견지한 농민운동의 역량은 자체 조직력이다. 농민조직은 3·1운동 이후 농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탄생했다. 농민대중이 자신의 권익과 민족독립을 위해 농민운동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농민들은 리(里)·면 단위의 소작인조합, 소작조합, 농민공제회, 작인동맹 등의 농민단체를 결성했다.

1920년대 후반기 농민조직은 제2차 산미증식계획에 의해 중소지주·자작농·자소작농 등의 계급적 몰락이 현재화하고,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해 갔다. 소작인조합은 자작농층을 포함한 농민조합으로 개편되기 시작한 것이다. 곧 1920년대 전반기 소작조합 중심에서 후반기 자소작농과 자작농까지 참여한 농민조합으로 확대 발전했고, 그 같은 연대 위에서 민족협동전선체로 신간회의 발족도 가능했던 것이다.

농민운동은 1910년대 모색기를 거쳐 3·1운동을 통해 성장한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바탕으로 1920년대에 대두 발전했다. 소작쟁의를 중심으로 전개된 농민운동은 1920년대 후반 일제의 본격적인 미곡수탈정책으로 제2차 산미증식계획이 시행되면서 한층 고양됐다. 소작농민만이 아니라 자소작농은 물론 자작농까지 농민운동에 동참함에 따라 소작쟁의를 중심으로 수리조합·곡물검사제·삼림조합·조선농회 반대운동, 화전민 항쟁까지 다양하게 분화한 것이다.

농민운동의 양상은 1929년을 분수령으로 크게 변한다. 1928년 코민테른 ‘12월 테제’와 1929년 세계 경제대공황의 영향으로 운동 환경이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특히 1929년 원산노동총파업과 용천소작쟁의,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3대 항일투쟁을 통해 민족의 주체적 역량 또한 급성장한 덕분이다.

1930년대 농민운동의 전개

1930년 초반의 농업공황은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을 크게 변화시켰다. 산미증식계획은 1930년대 전반기에 사실상 중단되고, 이른바 ‘농촌진흥운동’이라는 식민지 농업정책이 시행됐다. 아울러 농민운동에 큰 영향을 주던 사회주의 운동노선이 바뀐 탓이다. 이로써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민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른바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다.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농민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할 뿐만 아니라 토지혁명을 비롯한 민족혁명의 주요 과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이 운동은 1930년에 접어들면서 강화된 일제의 강압적 탄압에 대응해 폭력을 불사하는 혁명적 농민운동으로 진행됐다.

조선농화 기관지 조선농회보.

농민운동은 농민들이 토지에 묶여 있기 때문에 식민통치 당국의 탄압 대상이 되기 쉽고, 다양한 농민계층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조직화의 어려움이 많다. 또한 외부인사의 유입이 쉽지 않아 자체의 자생력과 운동역량을 갖추기 전에 지도부가 검거되면 지속적인 활동은 불가능해진다. 이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농민조합은 군·도(島)를 기본 단위로, 각 동리에 농조반을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면 단위의 농민조합 지부를 결성하는 방식으로 조직화를 이뤘다.

1930년대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투쟁양상은 1920년대 농민운동과 큰 차이를 보인다. 1920년대의 농민운동이 소작료 인하와 소작권 이동 반대 등 주로 경제권익 투쟁이었던 데 비해, 소작료 및 각종 공과금을 불납하거나 고리대를 상환하지 않는 등 식민지 수탈체제에 도전했다. 나아가 면사무소·군청·경찰서 등 말단 통치기관과 수리조합·삼림조합·농장사무소 등 수탈기관을 습격 파괴하거나, 각종 ‘기념일투쟁’ ‘구속 동지 탈환투쟁’ 등 강력한 투쟁을 펼쳤다.

1924년 결성된 조선노농총동맹 창립 기념사진. 1927년에 조선농민총동맹이 분립된다.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초기에 지나치게 빈농 위주로 나아가거나, 당시의 정치적 목표에 치우친 나머지 농민운동의 계급적 지평을 협소화시킨 점이 없지 않았다. 자작 부농층을 운동선상에서 배제하거나, 전투적이고 비합법적인 혁명적 농민조합을 무리하게 결성하여 농민 전 계층의 호응을 얻지 못한 점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1935년 들어 새로운 방향전환이 이뤄졌다. 다시 자작 부농층을 운동세력으로 포섭함으로써 이후의 농민운동의 양상은 달라졌다. 광범위한 연대를 바탕으로 반제·반일 투쟁을 전개하여 농민운동을 독립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농민운동의 의의

일제강점기 한국농민은 전 인구의 8할을 차지했다. 따라서 농민은 최대의 민족 구성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제는 민족문제요, 그들의 해방은 민족해방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농민은 일제의 수탈정책에 따라 점차 경제적으로 몰락함으로써 토지로부터 유리되고, 결국은 고향을 떠나야 하는 처지로까지 몰렸다. 비록 자작농, 자작 겸 소작농, 소작농이라는 구분은 있었으나 이들 농민의 처지는 모두 농가부채의 질곡 속에서 신음하던 절량농가와 궁핍농가라는 면에서 구별이 어려울 정도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농민운동은 3·1운동 직후 소작쟁의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 산미증식계획이 본격화되면서 소작농민만이 아니라 자작농과 자소작농은 물론, 중·소 지주층까지 동참함에 따라 다양하게 분화 발전했다. 특히 1930년대부터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이 대두하면서 투쟁성이 제고됨으로써 농민운동의 독립운동적 성격이 증폭됐다.

브나르도운동 광고 기사.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으로 시작했으나 이후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민족자강운동으로 성격이 전환된다.

초기 소작료의 인하나 소작권의 이동반대 등 권익투쟁 중심이었던 농민운동의 성격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치투쟁 중심으로 발전했다. 소작료와 각종 공과금의 납부 거부를 비롯해 부역동원 반대, 군수물자 강제수매 반대 등 일제의 수탈정책을 거부하고, 각종의 정치운동을 전개하면서 식민통치기관을 공격하는 등 식민지체제를 직접 겨냥한 것이다.

결국 일제강점기 농민운동은 계기적 변화과정을 통해 경제이익을 위한 권익투쟁에 머물지 않고, 항일 독립운동으로 성격을 확립해 나갔다. 따라서 한국민족의 절대 다수를 점하던 농민이 농민운동을 통해 일상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던 역사적 경험이야말로 해방 이후 민족 민주국가 건설의 원동력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김용달 /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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