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투쟁 어떻게 시작됐나
한국독립운동의 정신을 잘 드러내준 인물로 우리 국민은 누구를 가장 먼저 떠올리거나 꼽을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 백범 김구 선생, 윤봉길 의사, 세 분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이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의열투쟁의 선봉이었거나 그 투쟁을 이끌어간 주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정치적 평가와는 별개로 약산 김원봉도 빼놓을 수 없다. 백범과 약산은 의열투쟁 뿐 아니라 ‘최후의 대일결전’(중일전쟁·소일전쟁·미일전쟁이 발발할 때를 노려 국내로 진공하며 결행할 독립전쟁)에 대한 준비와 추진에도 오래도록 행보를 같이했다.

‘의열투쟁’은 197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한 용어이다. 소박하게는 ‘의사와 열사들의 투쟁’이란 의미로 읽힌다. 의사와 열사는 그 행동이 대의를 추구해 자기희생도 불사했다는 점이 같다. 둘의 차이는 무기를 갖고 공격적 거사를 벌였으면 의사, 맨손 맨몸으로 항거했음이 두드러지면 열사라고 하여, 호칭이 달라진다.

1905년 이래로 을사늑약, 군대해산, 강제병합의 연이은 민족적 치욕에 분노와 항의의 뜻을 담아 자결한 민영환·박승환·이만도·홍범식·황현 등의 순절지사가 다수 있었다. 또한 헤이그 밀사로 나갔다가 울분으로 발병해 순국한 이준 열사도 있었다. 그 다음으로 이완용·이근택 등의 매국노를 암살 응징코자 행동에 나선 기산도·나인영(나철)·이재명 등의 의사가 속속 나왔고, 1909년에는 안중근의 장쾌한 하얼빈의거가 있었다. 그로부터 한국인들의 마음속에는 ‘의사’의 표상이 강하게 자리잡아갔다.

안중근 의사 유묵 ‘경천(敬天)’

안중근이 의거현장에서 외친 ‘코레아 우레’는 꼭 10년 후에 ‘대한독립 만세’로 재생되어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그 얼마 후 1919년 9월에는 서울역에서 노인지사 강우규가 부임길의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져 터뜨려 민심을 격동케 했다.

그 해 11월 만주 길림에서는 청년지사 10인이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겠다며 의열단을 창립했다. 그 후 7년간 의열단은 ‘7가살(可殺), 5당파(當破)’의 기치 아래 전개해간 ‘암살파괴운동’으로 창단 취지를 그대로 담아냈다. 그 운동은 훗날의 용어인 의열투쟁의 의미를 압축해 보여주고 대표했으며, 상징하는 것처럼도 되었다.

무서운 기세로 확산되고 지속적으로 전개

동아일보에 실린 김상옥 의사 의거 기사.

비폭력적 만세시위 위주의 3·1운동은 전민족적 참여와 전세계적 반향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잔혹한 탄압을 뚫고나가지는 못했다. 이에 국외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육탄혈전의 각오와 의지를 더욱 굳히면서 가능한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일제와 싸워가려 했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하고 결전 태세를 강화해갔다. 만주지역의 독립군 조직과 무장투쟁 실행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국내 일제기관을 겨냥하는 청년 감사대(敢死隊)와 작탄대(炸彈隊) 조직 방침을 천명했다. 일제 요인과 반민족적 친일분자를 표적으로 삼는 ‘7가살’ 범주도 설정해 공표했다. 그렇게 임시정부는 일찍부터 의열투쟁의 중심부로 들어섰고, 구국모험단, 대한민국의용단, 대한광복군 총영 등을 통해 여러 거사계획과 실행을 주도·가담·지원했다.

의열단도 본거지를 중국에 두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거사를 기획하고 시도했다. 창단 직후의 제1차 국내기관 총공격 거사는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결행이 좌절되고 말았지만, 1920년 단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의거와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투탄의거, 1921년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진입 폭탄의거로 그 실패를 곧 만회했다.

뒤이어 1922년 상해 황포탄에서의 일본 육군대장 저격의거, 영화 ‘밀정’의 배경 이야기가 된 1923년 제2차 국내 대의거 추진(일명 ‘황옥경부 사건’), 1924년 서울과 도쿄의 대폭동 격발 추진과 김지섭의 일본 황궁 입구 투탄의거는 매번 일제당국을 경악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김상옥의 효제동 혈전과 1926년 나석주의 서울의거 역시 의열단 투쟁사의 한 페이지를 족히 장식한다. 

조선 총독부 기관에 보낸 의열단 경고문.

만주의 독립군조직들도 특파공작원들을 국내 서북지방으로 침투시켜 폭파 또는 응징처단 활동을 벌이도록 했다. 일본 영사관이 설치됐거나 군경기관 밀집지였던 상하이·베이징·텐진·하얼빈·장춘 등지에서도 병인의용대, 다물단, 한국혁명당 총동맹, 서로군정서, 벽창의용단, 의성단 등에 의한 의열투쟁이 활발히 이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계획·준비·실행을 혼자 도맡아 하는 단독결행 거사도 속출했다. 도쿄에서 서상한(1920)과 양근환(1921), 서울에서 송학선(1926), 대구에서 장진홍(1927)이 벌인 암살·폭파 거사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아나키스트들도 1923년경부터 ‘직접행동’의 의미를 담아서 의열투쟁 대열에 동참했다. 일본에서는 박열과 그의 동지들이 중심 주체로 나서고 의열단이 지원했다. 중국에서도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의열투쟁을 다양하게 벌여나갔다. 그것은 의열단과의 제휴활동, 베이징의 다물단과 상하이 남화한인청년연맹·흑색공포단·맹혈단의 조직과 활동 등으로 일련의 흐름을 형성해갔다.

이봉창 의사가 김구 선생(백정선으로 표기)에게 보낸 편지.

독립운동 방략의 하나로 우뚝 서다
이렇게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활발히 전개된 의열투쟁은 초기부터 독립운동의 어엿한 방략의 하나로 자리 잡고 본격화해 갔다. 의열투쟁도 무기가 동원되는 점에서는 일종의 무장투쟁이었다. 그러나 독립군의 군사활동과는 여러모로 대비되면서 그 빈터를 보충해주는 전술적 특성이 있었다. 그것은 기동성과 집중성을 최대로 기해 수행됨으로써 위력적인 성과를 낳는 경제적 투쟁방법이 됐다. 고강도의 의열투쟁이 낳는 충격과 공포 효과는 일제가 스스로 식민지 경영을 포기하도록 압박해가는 것이기도 했다.

이같은 이유로 일제와의 정면대결을 불사하며 결코 물러서지 않을 비밀결사형 실행조직들이 속속 결성되고, 그들이 기획해내는 연속·다발적 거사가 하나의 전형을 이뤄나갔다. 그로부터 의열 거사의 규모 확대, 수단의 다양화, 내용의 풍성화 추세도 나타났다. 그 연속선상에서 도쿄→상하이→만주→국내라는 연동선을 그려가며 기획 실행된 한인애국단의 웅대 의거들(1932), 조안득 등 6인의 우가키 총독 폭살의거 추진(1936), 조문기 등 3인 청년의 경성부민관 의거(1945) 등이 계속되면서 일제 패망 직전까지 항일 의열투쟁의 맥이 이어졌다.

당시 대한의용단 장정.

독립운동의 중핵이 된 의열투쟁
의열 거사나 그 기획들이 항상 성공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목표대로 완수되질 못했거나, 실행됐어도 성과와 효력이 기대 이하인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실패했고 좌절을 겪었더라도 그 속에서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크다.

자기희생 감수의 결연한 태세로 부단히 추진·감행된 의열투쟁이 암암리에 내뿜는 정치적 심리적 효과는 막대한 것이었다. 대중의 반일정서와 항일의지가 그때그때 환기 고취되어 일정 수위로 유지되고, 독립운동의 다른 부문들에 대해 용약분발의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의열투쟁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일제의 한국침략 강점과 식민통치에 대해 강력한 규탄과 응징의 횃불을 가장 높이 쳐든 것이 의열투쟁이었다.  

둘째, 소수 인원과 적은 비용으로 일제를 타격하고 큰 손실을 입혀, 결전기가 아닌 장기대치 국면에서 아주 효과적인 투쟁방법이 됐다.

셋째, 독립군 무력투쟁을 이끌고 도우면서 어깨를 나란히 해 독립운동 역량 축적의 밑거름이 됐다. 일제 식민통치의 기반을 뒤흔들고 그 기생세력에게는 심대한 위협 요소가 됨으로써 국내외 독립운동 발전과 민족의식 고양의 호조건을 조성했다. 

넷째, 절대독립에 대한 민족적 희원과 그 추구 의지를 국제사회에 부단히 표출해 알렸고, 민족성원들에게는 일제 타도와 독립 달성의 희망을 지속적으로 불어넣었다. 그럼으로써 의열투쟁은 독립운동 에너지의 견고한 보루요 배후지 역할을 했다.

다섯째, 의열투쟁이 담아내던 역사적·국제적 정의 회복의 의지와 열정, 또한 그것을 온몸으로 구현한 의사들의 언행과 발자취는 민족사의 크나큰 굴절과 아픈 상흔 속에서도 보석처럼 빛을 발하며 한국인의 역사적 기억의 심층으로 스며들었다.

이러한 의열투쟁의 기백과 정신을 오늘의 우리가 잘 이어받고 후대로도 전한다면 그것이 미래한국의 튼튼한 정신적 보루가 되어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의열투쟁은 가슴 벅찬 우리 독립운동사의 중핵이라고 볼 만하지 않은가.

김영범 /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

윤봉길 의사 기념관 전시실 모습.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은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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