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28일 열린 진주시 6·25전쟁 학도병 명비 제막식에서 조재섭 국가유공자(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참석자들과 함께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묵묵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 희생을 바탕으로 존재한다. 일제 강점기를 넘어서자마자 닥친 6·25전쟁. 국군과 미군과 유엔군이 전쟁의 주인공이라면, 이들과 함께 혹은 이들을 지원하며 싸운 이름 없는 이들 또한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들 중 하나가 학생신분으로 책을 물리고 총을 들었던 학도의용군이다.

 

조재섭 국가유공자(86). 그는 진주농림고등학교에 다니던 중 전쟁이 일어나자 나라를 지키는 일에 동참하겠다고 나섰던 학도의용군이다. 그는 지난 5년여 간 함께 전쟁을 치렀던 교우이자 전우들의 공헌을 남기기 위해 경남 진주 지역에 학도병 명비 세우기 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그의 5년 여의 노력이 결실을 보아 지난해 11월 28일, 드디어 '진주시 6·25참전 학도병 명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경남지역에서는 두 번째, 지역 학교가 연합으로 명비를 세운 것은 첫 번째 성과다. 명비 건립을 직접 도운 경남서부보훈지청과 진주시 관계자들이 함께 모인 가운데 열린 제막식은 감동의 현장이었다.

이 역사적인 명비에는 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한 진주농림고등학교(현 경남과학기술대), 진주사범학교(현 진주교육대), 진주고등학교 등 3개 학교 재학생 152명의 이름이 새겨졌다.

“노병(학도의용병)은 살아서 말한다/ 1950년 7월 초/ 어느 날 종례시간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의 훈시/ ‘6·25 남침으로 조국이 위기를 맞았다/ 너희들의 자진 입대를 권유한다’고/ 엄숙히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지원을 반쯤 승낙했고/ 어머는 끝까지 만류했다/ 어머님의 말씀을 뿌리친 채/ 국토의 최후방어선인/ 낙동강 기계전투에서/ 교복을 입은 그대로/ 난생 처음 잡아보는 총을 들고/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포탄속에서/ ‘어머니’를 절규하며/ 쓰러져간 전우들의 ‘사모곡’ 잊을 수 없어/ 여기 어린 학도의용병 영령들의 나라사랑 충혼을/ 돌에 새긴다”

‘호국의 꽃’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직접 쓴 글이 명비의 뒷면에 새겨졌다.

“일제 강점기에 10대 시절을 보냈습니다. 전쟁이 터진 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누구랄 것 없이 우리가 나서서 나라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학교(당시 진주농림고) 150여 명의 학생 중에서 60여 명이 학도병으로 나섰습니다. 나 하나의 생명보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우리는 부산에서 10일간의 훈련을 받은 다음 바로 낙동강전선에 투입됐습니다. 학업 대신 기계전투, 안강, 당부동전투 등 당시 치열했던 모든 전장을 누볐습니다.”

군복도 없이, 군번도 없이 치렀던 그 전투에서 참으로 많은 친구들이 희생됐다.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친구들의 모습은 끝내 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살아남은 사람들도 전쟁의 후유증으로 사회에 적응하기 쉽지가 않았다.

조재섭 유공자는 그런데도 학도병들의 참전과 공헌, 그들의 희생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나라도 나서서 우리 지역에서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이들의 이름이라도 새겨놓자’는 생각에 현업에서 은퇴한 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참전했던 전적지와, 전국의 현충비, 각 지역의 학도병 관련 기념물을 돌아본 그는 2013년부터 진주시 3개 고교를 방문해 참전 학도병의 명단을 요청하는 것으로부터 명비 건립작업에 구체적인 시동을 걸었다. 명단 수집을 완료한 후에는 2014년 당시 진주보훈지청에 추모비 건립을 요청하고, 가칭 학도의용병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를 만들어 힘을 모아나갔다.

진주시의 협조로 2017년 입지를 확정한 후 진주보훈지청이 지난해 초 건립승인과 예산을 확정하면서 사업은 급진전됐다. 설계 작업 등을 미리 준비했기에 명비제작과 11월 준공은 순조롭게 이뤄졌다.

“그래도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이 명비를 관리하고 위령제라도 정기적으로 올렸으면, 그래서 후세에게 전쟁의 교훈과 전쟁에 참여한 이들의 애국을 기릴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참전자 단체도 제대로 만들지 못한 탓에, 사실상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점이지요.”

‘역작’을 이뤄냈지만 그의 한숨은 깊었다. 그러나 그는 이름을 남겼으니, 그리고 좋은 장소에 명비가 섰으니, 오가는 이들에게 우리들의 뜻과 정신이 전달될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우리 학우, 전우들의 애국정신이 이제 여기에 당당하게 세워진 것만 해도 감개무량입니다. 역사가 기억하면 됩니다. 다시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도 곳곳에서 힘을 내고 있으니 오늘도 우리는 명비를 바라보며 큰 위안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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