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19일 ‘아일라’ 시사회에서 김은자 씨가 연출을 맡았던 잔 울카인 감독, 아일라 역을 연기했던 배우 김설 양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참혹한 전장, 그 속에서 조용히 빛을 발한 달빛 같은 소녀의 이름 ‘아일라’.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개봉한 터키 영화 아일라는 터키어로 ‘달’이라는 뜻이다. 전쟁고아로 유엔 참전용사들과 함께 전장을 누빈 달빛 아이, 터키 병사들이 붙여준 소녀의 ‘정확한 이름’인 셈이다. 아일라의 실제 주인공 김은자 씨(73)를 만났다. 인천 주안역 인근에서 만난 그는 며칠 전 극장에서 만났던 영화의 감동과 함께 주인공들의 분위기와 향기가 실제로 묻어났다.

이날따라 서늘한 바람이 갈 길 바쁜 사람들을 위로하듯 불어오고 있었다.

주안역 인근 관공서 건물에서 만난 김은자 씨는 영화에서 역할을 한 아역(김설 분)과 최근의 역할(이경진 분) 두 얼굴을 그대로 안고 나온 듯했다. 새삼 확인할 필요도 없는 달 같은 아일라, 그는 은은한 눈빛과 정겨운 어감으로 살아 다가왔다.

네 살 꼬마가 1년 6개월여 겪는 전장에서의 경험을 고스란히 간직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세월도 벌써 엄청나게 흘렀지 않은가. 그래도 찾고 싶은 기억이 평생을 강하게 지배했다.

“언젠가는 서울 한남동을 지나다 터키대사관을 발견했어요. 나도 모르게 그냥 다가가 내가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버지’를 찾고 있다고 얘기했지요. 무턱대고 터키 참전용사를 찾아달라고 했으니 그분들도 조금은 어이가 없었겠지요.”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그렇게 해서는 찾을 수가 없다’는 답을 듣고는 쓸쓸한 마음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평생 가슴에 담고 있던 아버지는 그렇게 영원히 다시 못 볼 줄 알았다.

참전용사 ‘아버지 슐레이만’도 아일라를 열심히 찾기는 마찬가지였다. 터키의 한인회장을 찾아 아일라라는 이름과 당시 네 살 소녀였다는 정보를 전달했지만, 역시 한국 이름조차 모르는 상태로는 만나기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다.

그러다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한 방송사에서 6·25 특집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다 이 미담을 듣고 자료를 뒤지던 중 양측을 거의 맞추는 조각이 꿰맞춰졌다. 양쪽에 연락이 닿았다.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어릴 적 사진을 본 순간 두 사람은 각각 아일라를, 그리고 아버지를, 바로 알아보고 외쳤다. “똑같네.”

드디어 2010년,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참전용사 초청 프로그램에서 60년 만의 역사적 만남이 이뤄졌다. 두 사람은 김은자 씨가 이미 터키어를 모두 잊어버린 상황에서도 표정과 손발로 소통했다. 방송과 다큐를 매개로 그는 여러 차례 터키를 방문하며 아버지와의 정을 나눴다.

그러나 모든 만남은 헤어짐을 준비하는 법. 아버지 슐레이만은 그렇게 살가웠던 아일라를 두고 지난 해 12월 갑작스런 폐렴으로 운명했다. 별장으로 놀라가자고 제안하고, 터키로 오면 집도 사주고 할 테니 아예 가까이서 함께 살자고 말하던 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아쉽지요. 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고, 더 많은 정을 나눌 수 있었는데. 지금도 아버지 생각만 하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터키에서는 공전의 히트를 친 작품이라 이미 ‘아일라’는 터키 어디를 가든 인기 스타다. 레드카펫을 밟은 것은 물론, 터키 대통령도 그에게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아이돌’급 유명인이 됐다.

“다행인 것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가까이서 병원을 찾으며 함께 마지막 정을 나눌 수 있었다는 거예요. 의사들 얘기로는 아버지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제가 가서 손을 잡아드리거나 아일라가 왔다고 얘기하기만 하면 심박수가 달라진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이제는 편지로만 사진으로만 만나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 따뜻한 감정은 여전히 함께 있는 것 같아요.”

아일라 김은자 씨는 전장에서 듬뿍 받았던 그 사랑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왔다. 30여년 이상 남들이 힘들어 하기를 꺼려하는 간병인으로 일하며 아프고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했다. 그 스스로 사명감이 아니면 결코 긴 시간 그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 얘기한다.

지금도 몸이 조금 아파 쉬고 있지만, 언제나 다시 아픈 사람들 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의지를 보인다. 할 수 있는 시간까지, 본인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언제나 달려 나가겠단다.

‘아일라’의 이 따뜻한 마음과 생활자세가 모두 ‘형제의 나라’ 터키 병사들과 나눈 어릴 때의 ‘사랑의 교감’ 때문은 아닐까.

 

 

▲ ‘아일라’ 시사회에서 만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과 김은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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