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6년 11월 4일 인천고등학교에서 열린 학도병 명비 제막식에 참석한 이경종 씨(뒷줄 오른쪽 첫번째).

1950년 겨울, 교복을 벗어 두고 어색하고 묵직한 군복으로 갈아입는 소년들이 있었다. 소맷자락이 손을 덮을 만큼 길게 내려오고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게 하려고 허리띠는 볼품없이 졸라맸다. 부드러운 뺨에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학생들은 조국을 지키려고, 북한군에 잡히지 않으려고 굳은살도 박이지 않은 손에 자기 키만한 총을 들고 부산으로 갈 채비를 했다. 하나 둘 ‘축현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200여 명의 학생들 속에 이경종 군이 있었다. 이제는 지팡이에 의지해 힘든 걸음을 옮겨야 하는 처지가 됐지만, 그때 기억을 떠올리는 그의 눈빛은 아직까지도 형형했다.

 

“인민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모두들 정신이 없었어요. 아들을 둔 부모님들은 자식이 인민군에 끌려갈까봐 불안해하셨고요. 그래서 학도의용대원들이 남하를 결정했을 때 생이별의 아픔을 뒤로 하고 보냈겠지요. 자식 생각하는 마음에 어린 학생들까지 학도의용대 형님들께 맡겨서 보내는 분들도 많았어요.”

인민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에 이경종 씨(85)는 친 형을 쫓아 인천학도의용대원으로 아직 입대도 할 수 없는 16살 어린 나이에 동무, 형님들과 함께 1950년 12월 18일 부산으로 출발했다. 걷기도 하고 열차를 타기도 하며 20여 일을 걸어 12월 말 마산까지 내려온 그들은 이듬해 1월 10일 부산으로 이동해 입대 절차를 마쳤다.

그와 같이 나이가 어려 입대가 허락되지 않은 어린 소년들은 실종자나 탈영병의 군번을 받는 편법으로 입대했고, 그 역시 실종장병의 군번을 부여받아 훈련과 전투에 나서다 19살 되던 해 비로소 본인 명의의 군번을 받고 정식 군인이 됐다.

“제대로 된 제 군번줄을 받고 많이도 울었어요. 내가 혹시 죽었을 때 우리 어머니가 나를 찾지 못하면 어떡하나 많이 걱정했거든요. 조국을 위해 죽더라도 이제는 어머니가 나를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죠.”

복무 중 그는 향로봉전투, 지리산전투, 금화지구전투 등 굵직한 전투에 투입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4년 간 복무하며 6·25전쟁을 치른 그는 휴전 후 1954년 12월 만기 전역했다. 전역하자마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21살 어린 나이에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가세가 기울어 중단된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고, 배운 것이 없어 취직도 할 수 없는 처지가 서글펐다. 그러나 생계를 소홀이 할 수 없었던 그는 친구의 소개로 한 제강회사에 취직하게 됐고, 가정을 꾸리면서 가족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세월을 보냈다.

“아들 셋을 번듯하게 키워놓고 보니까 지나온 날들이 사무치지 않겠어요? 함께 굶주리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어려운 시간을 보냈던 전우들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혼자만이라도 그때 ‘축현초등학교’에서 함께 출발한 208명의 학도병 동지들을 기억하고 역사에 남기고 싶었던 그는 1996년 말부터 전우들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좋은 세상 누리지 못하고 전사한 친구들의 한을 풀어주고도 싶었다.

큰 아들이 아버지에겐 큰 힘이 됐다. 아버지와 함께, 때로는 아버지보다 더 열성적으로 당시 아버지와 길을 나섰던 208명의 학도병을 쫓아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하고 남겼다. 부자(父子)는 기록한 자료를 ‘인천학생6·25참전관’을 설립해 보관했고, 사료 가치를 인정받아 올해 문화체육관광부에 박물관으로 정식 등록됐다.

“우리와 같은 참전유공자나 국가유공자의 아픔이 남의 아픔처럼 느껴진다면 같은 민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나섰던 사람들의 희생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함께 슬픔을 느낄 수 있어야죠. 특히 학도병들은 어린 나이에 순국해 추모해줄 수 있는 가족조차 없어요. 우리 민족이, 사회가 함께 고민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동안 모으고 기록해왔던 전우들의 흔적을 다시 한 번 천천히 훑어보는 그의 눈길이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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