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 당시 이름도 군번도 없이 전선으로 투입됐던 지게부대.

6·25전쟁은 전후방이 따로 없는 총력전이었다. 여기에 어린 학생들과 연약한 여성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해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고자 노력했다. 이른바 학도의용군과 여성의용군이었다.

총력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군대에 들어갈 나이가 훨씬 지난 3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의 이 땅의 남자들도 조국의 위기를 보고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의 좁고 험한 산악지형에 적합한 지게(A-Frame)를 짊어지고 전쟁터로 나섰다.

 

지게 짊어진 참전자의 ‘공헌’

비록 나이가 들어 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지는 못하지만,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국군과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멀리서 달려온 유엔군에게 탄약과 식량 그리고 보급품을 날라주기 위해 감연히 나섰다. 이른바 노무자들로 구성된 ‘지게부대(A Frame Army)’였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운반수단인 지게가 영어의 알파벳 ‘A’와 비슷하다고 해서 그런 명칭이 붙었다. 정식명칭은 노무부대(勞務部隊)였다. 노무부대는 최초 민간인 운반단에서 노무단으로, 나중에는 노무사단과 노무여단으로 확대됐다.

노무부대는 군복도 군번도 없었다. 그들은 평상시 입고 있던 하얀 무명옷을 입은 채 지게를 짊어지고 총탄이 쏟아지는 험한 산길을 기어오르며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국군과 유엔군에게 탄약과 식량 그리고 장벽자재를 운반했다. 아무리 용맹한 군인이라도 식량과 탄약 없이는 싸울 수 없다. 노무부대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국군과 유엔군이 오로지 전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보급품을 운반했다. 전 국토의 70%가 산악지대인 한반도의 지형에서 지게부대는 그런 면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수송부대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노무부대는 차량이 들어갈 수 없는 산꼭대기의 참호까지 전투에 필요한 물자를 적시에 보급해 줬다. 그들은 지게에 탄약이나 전투식량을 지고 차량이나 우마차(牛馬車)가 지나갈 수 없는 좁고 험한 산길을 오로지 두 다리에 의지해 보급품을 운반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올 때는 전사한 시체나 부상자를 지고 내려왔다. 그런 점에서 노무부대는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싸우는, 전장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전투 병력이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전선의 젊은 병사들을 격려하고 자식처럼 어루만져 주는 아버지나 형님 같은 역할도 했다.

그러다보니 노무부대의 수고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노무부대가 전선으로 운반해야 될 탄약과 식량과 그리고 장벽자재는 차량이 들어올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싸우고 있는 산꼭대기까지는 보통 수 십km가 넘는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그들은 이 거리를 하루에 몇 번이고 왕복하며 임무를 완수했다.

노무자들은 매일 10km가 훨씬 넘는 산꼭대기까지 평균 45kg에 달하는 보급품을 운반했다. 그들은 거의 자신의 몸무게에 해당하는 무거운 보급품을 지게에 짊어지고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때마다 그들에게는 생사를 넘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사람, 부상자도 있었고, 실종된 자도 있었다. 그렇다고 노무자들의 대우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오로지 자발적으로 또는 국가의 부름에 자신의 몸을 바쳐가며 국가에 위국헌신(爲國獻身)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대한민국의 숨어있는 진정한 전쟁영웅들이었다.

 

총인원 30만 명 참전, 값진 희생

만약 6·25전쟁 때 이들이 없었다면 전쟁을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량이나 우마차가 지나갈 수 없는 전선의 그 산꼭대기까지 무슨 수로 탄약과 전투식량을 운반하며, 그런 상태에서 고지의 국군과 유엔군이 어떻게 전투를 치를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하면 아찔할 따름이다. 그렇게 보면 6·25전쟁의 가장 어려운 전투는 노무부대가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공이 결코 적지 않다.

노무부대는 그런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6·25전쟁 초기 노무자들은 1개 보병대대에 평균 50~60명이 있었다. 국군전체로는 4,000~5,000명에 달하는 숫자였다. 그러다 전선이 낙동강으로 내려오면서 노무자의 수요는 급증했다. 나중에는 3개 노무사단과 2개 노무여단이 만들어져 미군 3개 군단과 국군 2개 군단을 각각 지원하게 됐다. 10만 명에 달했다. 그만큼 전쟁을 수행하는데 노무부대 역할이 증대됐음을 의미했다.

그 결과 6·25전쟁 3년 동안 동원된 노무부대의 총인원은 30만 명에 달했다. 그 과정에서 노무자들의 희생도 만만치 않았다.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多富洞) 전투에서는 하루 평균 약 50명이 희생됐다. 그렇게 해서 전쟁기간 전사한 노무자가 2,064명에 실종자가 2,448명 그리고 부상자가 4,282명이나 발생했다. 무려 8,794명의 노무자가 피해를 입었다. 엄청난 피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노무부대의 값진 희생으로 대한민국은 전란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전투의 절반은 그들이 한 셈이다.

전쟁기간 노무부대는 오로지 나라사랑 정신에서 우러나온 애국심에 의지해 무거운 보급품을 짊어지고 험한 산길을 걷고 또 걸으며 전선의 이곳저곳에 탄약과 식량을 날랐다. 그들에게는 허름한 군복조차도 사치였다. 그들은 명예도 바라지 않은 채, 오로지 다 떨어진 무명옷과 낡은 지게에 자신의 육신을 의지하며 군번도 없이 그들에게 주어진 막중한 임무만 묵묵히 수행했다. 그런 점에서 노무부대는 이 땅의 진정한 숨은 애국자이자 전쟁영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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