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리 스미스씨가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김치 아기’들을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촉촉이 내리는 봄비에 훈풍이 섞였다. 햇살이 봄비에 잠시 자리를 내준 어느 봄날, 68년 전 거제의 봄을 기억하며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훈풍에 실려 온 특별한 손님,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피난민을 구조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승선원 벌리 스미스(Burley Smith, 89)씨가 그 주인공이다.

 

 

벽안의 노(老)승무원은 긴장인지 감격인지 알 수 없는 갖가지 감정이 가득실려 상기된 표정으로 거제 포로수용소유적공원 내 흥남철수작전기념비 앞에 섰다.

가족, 동료들과 크루즈 여행 중인 그는 전날 부산항에 도착한 후 거제로 이동, 기념비를 찾아 먼저 별세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오나드 라루 선장, 함께 작전을 수행했던 승무원 등을 위한 추모행사에 참석하고 헌화했다.

그의 한국 방문은 6·25전쟁 때 처음, 그리고 2008년 방문 이후 10년만이다.

그는 ‘흥남철수작전’이라는 한국전쟁에 한 획을 그은 작전에 투입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항해사였다. 그는 ‘흥남철수작전’이라는 기적을 일군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이다.

“68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혹독한 추위에 먹을 것도 없이 화물칸에 빼곡하게 웅크려 체온을 나누던 북한 피난민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그들은 난생 처음 보는 외국인이 운전하는 배에,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했지만 자유의 땅에 도착할 것이라는 믿음과 용기가 흥남철수의 기적을 만들어 냈지요.”

정원을 훌쩍 넘겨 항해를 시작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는 3일 간의 항해기간 중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았고, 거제에 도착했을 때는 오히려 다섯 명이 늘어나 있었다. 배 안에서 태어난 이른바 ‘김치1호~5호’다.

그가 거제에 들른다는 소식을 듣고 ‘김치1호(손양영 씨·68)’와 ‘김치5호(이경필 씨·68)’가 한달음에 거제로 달려왔다.

“배가 언제 좌초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그 속에서 태어난 새 생명들은 기적과도 같았습니다. 이제 할아버지가 된 ‘김치 아기’들을 다시 만나서 아주 기쁩니다.”

그는 지난 1월 문재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문 대통령의 부모님이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 대통령과 그의 모친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적은 것이다.

“요즘 국내외 정세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답장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문 대통령께 답장을 받았을 때 아주 기뻤죠.”

문 대통령은 2월 20일 그에게 ‘한국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벌리 스미스님을 비롯한 훌륭한 선원들이 없었더라면 나의 부모님이 거제도에 오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며 ‘일정이 허락지 않아 만나기 어렵고, 모친도 91세 고령이어서 환영 인사를 하기 힘든 상황’이라 전했다. 문 대통령은 국가보훈처에서 그의 일행을 맞이하고 따뜻한 점심을 대접할 수 있게 조치했다.

“많은 이들이 흥남철수작전을 기적이라고 말해요. 제가 생각하는 진짜 기적은 용맹스러운 미군과 북한 피난민들의 신념과 용기, 남한 사람들이 보여준 따뜻함입니다. 그렇게 이뤄낸 기적은 68년 동안 대한민국이 이렇게 일어날 수 있었던 힘이 됐고, 국민들을 성숙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기적의 배’였다며 ‘피난민의 아들’인 문 대통령이 또 한 번의 기적을 이뤄 언젠가 빅토리호가 출발했던 ‘흥남’에도 갈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고인이 된 빅토리호의 동료들과 자신을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거제를 뒤로 했다. 그날의 기적이 승선원과 피난민의 가슴에 남아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오늘의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 장진호 전투, 문 대통령, 벌리 스미스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은 첫 정상외교 발걸음을 장진호전투기념비 헌화로 시작했다. 문 대통령은 장진호전투기념비가 있는 버지니아 주 콴티코 해병대 박물관에 들러 헌화를 마치고 미국 순방 공식 일정을 소화했다.

장진호 전투는 6·25전쟁 당시 유엔군이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피란민들이 흥남부두를 통해 철수할 수 있도록 기여한 역사적인 전투다. 문 대통령이 기념비를 찾은 것은 흥남부두를 통해 피난길에 올랐던 피난민들 사이에 그의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그때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른 피난민 중에 저의 부모님도 계셨고, 무려 1만4,000여 명의 피난민을 태운 빅토리호는 기뢰로 가득한 죽음의 바다를 건넌 자유와 인권의 항해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완벽하게 작전을 수행했다”고 말했다.

지난 5일 메러디스 빅토리호 생존 승선원인 벌리 스미스 씨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올해 1월 자신이 한국에 들른다는 소식을 담아 문 대통령에 편지를 보냈고, 대통령은 2월에 답장을 보내 이번 방한이 성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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