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따뜻해진 날씨로 산수유 노란 꽃망울이 톡톡 터지기 시작할 무렵, 따뜻한 손길로 형편 어려운 국가유공자의 마음에 꽃씨를 틔워주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15년 째 꾸준히 소리 없이 국가유공자를 위해 기부를 이어온 오선진(61) 씨다. 훤칠하게 큰 키에 ‘따뜻한 마음’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다소 무뚝뚝한 표정의 그가 동생과 함께 사무실 문을 열었다.

한 사람의 국민으로써 보훈가족으로써 ‘조용한 기부활동’을 하고 있는 자신이 특별할 것이 무엇이냐고 쑥스러워 하는 그를 대신해 옆에서 그를 지켜봐왔다는 동생 오종진 씨가 형 자랑으로 바쁘다.

“우리 형이 가족을 위해서 정말 힘들게 어렵게 살았어요. 철도공무원이셨던 아버지가 사고로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시고 나서, 형이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습니다. 대학교 다니랴, 어머니 돌보랴, 농사일 하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랐을 일을 형 혼자서 다 해냈죠.”

가장 감수성 풍부했을 10대 후반, 갑작스런 아버지의 사고로 집안의 생계가 막막해졌다. 먹고 살 일이 걱정돼 일을 나선 어머니를 돕느라 고등학교 진학을 2년이나 늦추고 집안 살림과 형제들 뒷바라지에 나섰다. 어려워진 그의 가족이 보훈가족으로 나라가 주는 혜택이나마 받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사고 때문이었다.

“보훈가족이라고 국가에서 장학금을 지원해줘 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어요. 지금하고 있는 사업이 처음 자리 잡을 때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됐고요. 저는 그 점을 항상 감사하게 생각했고, 잊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형편에 꿈도 희망도 포기해야 할 순간이 많았지만,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것은 가족의 배려와 국가의 도움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다.

직장 생활을 하다 ‘더 큰 뜻’을 가지고 직장을 그만둔 그는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자는 시간, 먹는 시간 줄여가며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바빴던 마음과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 그는 어릴 때부터 생각해오던 다짐을 기억해 내고 보훈지청에 개인 자격으로 쌀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속한 것이 한 해 두 해 쌓여 그게 벌써 15년째. 그는 국가유공자에게 보내는 쌀은 특별한 정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반드시 보내기 직전 도정한 햅쌀만을 고집한다.

“저는 그저 물질적인 도움만 드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보다 더 어려운 시절 목숨 바쳐가면서 국가와 저를 있게 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죠. 그분들은 존경과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그분들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겁니다.”

그가 국가유공자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갖게 된 것은 6·25참전유공자인 장인의 삶과 장례과정의 영향도 컸다. 장인의 장례식에 국가에서 태극기를 보내 관을 덮어주는 의식, 그리고 장인의 비석에 그려진 태극기를 보면서 항상 ‘애국’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사업이 매년 좋을 수만은 없었지만, 그래도 후원을 중단하지 않은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생한 분들이 어렵게 사는 모습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쌀을 보낼 때마다 꼬박꼬박 고맙다는 전화와 함께 평소에도 친부모처럼 꾸준히 그의 안부를 묻는 연락도 그에게는 큰 힘이 됐다.

“제 사업을 유지하는 동안은 후원을 계속 할 겁니다. 더 열심히 일해서 후원금도 늘리고 싶고요. 제 다음 세대들에게도 국가유공자의 희생이 헛되지 않고 오늘 우리 삶을 지탱하는 바탕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싶어요. 그게 더 강한 나라로 가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최근에 본 손자가 삶의 낙이란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국가유공자를 예우하는 나라, 그 따뜻한 마음들이 모여 더욱 풍요로워지는 나라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 올해 오선진 씨가 기부한 쌀을 전달하기 위해 충북남부보훈지청 직원들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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