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는 이제 한 달만 지나면 80이 된다. 그것은 언제일지 모르지만 죽을 날이 매우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지난날들을 자주 돌아보게 되고 ‘그때 그랬더라면’ 하고 회한에 빠지는 날들이 많아졌다.

지금 나이의 절반쯤 됐을 무렵이었던가.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도시의 통상생활에서 벗어나 남쪽 해안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며칠이고 해안을 훑어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널따란 평지를 찾아내 그곳에 통나무집 한 채를 지을 방법이 없을까 생각을 거듭했다.

집 안에는 방 둘과 마루와 부엌을 들이고 부뚜막에는 가마솥을 걸고 아궁이는 깊게 파고 굴뚝은 높게 올려 아침저녁으로 흰 연기를 하늘로 피워 올리고 싶었다.

그리고 벽과 방바닥은 황토를 바르고 마당에는 지하수를 뚫어 그 물로 쌀을 씻고, 가꾸는 생물과 기르는 가축에게는 각각 물을 뿌려주고 목을 축이게 할 생각이었다. 또 텃밭은 사립문 바로 앞에 일굴 계획이었다.

텃밭 둘레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세우고 울타리 안에는 야채밭과 완두콩, 조, 수수, 녹두 등 잡곡과 감자와 고구마 밭을 일구고 집 뒤뜰에는 닭장과 돼지우리를 세울 생각이었다. 마을 입구 어디쯤 형편 되는대로 논과 보리와 밀과 면화 밭도 마련해 경작에는 마을 사람들의 지도와 도움을 받는 방안도 궁리해 보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모두 생명을 가꾸는 작업이기 때문에 지극한 정성과 엄청난 공을 쏟아야한다는 셈도 했다. 그러자 그 일은 결단코 쉽지 않을 것이고 섣불리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과 망설임도 뒤따랐다. 하지만 도시의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며 속고 속이고 놀라고 분노하면서 흘려보내는 삶보다 백배 천배 낫지 않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기는 해도 혼자 하기는 너무 벅찬 일 같았다. 아무래도 동반자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계획만 그럴싸하다면 어느 날 갑자기 적절한 동반자들이 나타날 것도 같았다. 어쩌면 그 동반자는 즐거움과 행복을 샘솟게 할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되지 않을까도 싶었다.

침착하고 꾸밈없고 평온하고 겸손한 사람들이라면 금상첨화일 터였다. 이 나라에는 모진 역경을 겪으며 살아낸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던가! 자유와 평화와 풍요가 넘치는 천국이 바로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의 나의 생각을 한때의 공상으로 끝낼 일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눈 딱 감고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옳았던 일 같았다. 이제는 지나버린 일이지만 요즘도 나는 그런 꿈을 꾼다. 꿈에서나마 그 텃밭과 울타리와 가축들을 그리며, 시원하게 열린 풍광을 그린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 이즈음에 그 길을 꿈으로나마 그리며 천천히 가는 일은 상상의 일이라는 점이 다소 아쉽지만, 즐거운 새 삶의 순간들이라 조금 설레기도 하다.

‘그때 그랬더라면’ 지금 더 신나는 천국의 문턱을 넘는 즐거움이 있었을까? 지금까지 살아온 길의 즐거움보다 훨씬 나은 여정이었을까?

두 길을 함께 걷는 요즘, 양 손에 든 과자를 든 아이의 심정으로 하루를 맞는다. 그리고 더 즐겁게.

박진 월남전참전유공자, 주요 통신사 기자 등으로 활동, 현재는 일산에서 회고록 등을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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