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마고지 탈환 후 환호하고 있는 국군 제9사단 용사들 모습.

백마고지 전투는 국군9사단이 ‘백마부대(白馬部隊)’라는 부대명칭을 얻게 만든 성공적인 방어전투를 일컫는다. 백마고지 전투로 9사단은 국군뿐만 아니라 유엔군에서도 유명세를 타게 됐다.

당시 전황은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연기되면서 국내외 언론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전투지역으로 쏠리게 됐다. 그때 중공군에 의해 백마고지 전투가 시작됐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이었다. 국군9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철원지역의 백마고지를 빼앗기 위해 중공군 38군의 3개 사단이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중공군은 백마고지를 빼앗기 위해 작심을 하고 공격했다. 중공군은 백마고지를 고립시키기 위해 백마고지 후방을 감싸고도는 역곡천을 범람시키기 위해 인근에서 가까운 저수지인 봉래호의 둑을 터뜨려 백마고지에 대한 아군의 증원을 방해했다. 철저히 준비된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중공군은 백마고지를 쉽게 점령하지 못했다. 누가 보더라도 전력상으로나 수적으로 중공군의 승리가 점쳐지는 싸움이었다. 얼핏 봐도 9사단이 3대1 정도로 열세였다. 전투는 3개 사단을 동원한 중공군과 국군9사단 간에 치열한 공방전에 의한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서울과 워싱턴, 그리고 도쿄의 관심을 끌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 밴플리트 사령관 참관

그러다보니 그 결과의 향배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국군 및 유엔군 수뇌부와 공산군 수뇌부 간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됐다. 이제는 결코 서로가 양보할 수 없는 전투가 됐다. 그것을 지켜보던 군 수뇌부의 ‘응원전’도 뜨거워졌다.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미 8군사령관이 9사단을 방문했다. 광복 후 3년 간 미 군정사령관을 지낸 하지(John R. Hodge) 육군대장도 그때 한국을 방문했다. 하지 장군은 일정을 쪼개 최전선의 백마고지를 찾아 전투를 직접 참관하며, 9사단 장병들을 격려하고 돌아갔다.

중공군은 철원평야에 우뚝 솟아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백마고지를 오래전부터 노리고 있었다. 백마고지를 점령하게 되면, 남쪽으로 10킬로미터를 더 확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백마고지 남쪽에는 더 이상의 높은 고지가 없는 평야지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경우 국군과 유엔군은 어쩔 수 없이 현 전선을 남쪽으로 10킬로미터 후퇴시켜야 했다. 중공군은 그 점을 노렸다.

중공군이 노린 것은 또 있었다. 중공군은 한반도 중부지역의 유일한 곡창지대인 철원평야를 확보해 식량문제도 해결하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철의 삼각지대, 즉 철원-평강-김화를 연결하는 중부지역의 전략적 거점의 한 축인 철원지역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차후작전에서 유리한 이점을 얻으려고 했다.

철의 삼각지대는 남북으로 연결하는 3번 및 5번국도와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이 있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1951년 7월 휴전회담 이후 벌어진 고지쟁탈전의 중요 전투는 주로 이곳에서 벌어졌다.

 

백마 누워있는 형상 보여 명명

그런 백마고지 전투에서 9사단이 승리하게 됐으니,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10일간 중공군 38군과 국군9사단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12차례에 걸쳐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치르면서 고지의 주인이 7번이나 바뀌는 혈전을 치렀다. 그 과정에서 9사단 장병들의 희생도 컸다. 대표적인 것이 백마고지 탈환에 결정적 기여를 한 ‘백마고지 3용사’의 죽음이다. 군인으로서 그들의 책임감과 숭고한 희생으로 마침내 백마고지는 9사단 장병들의 품에 안기게 됐다. 피와 살과 땀으로 얻어낸 값진 승리였다.

백마고지는 원래 명칭이 없었다. 해발 높이인 395미터를 따서 395고지라 불렀다. 그런 395고지가 백마고지가 된 데에는 까닭이 있다. 10일간의 전투동안 양측은 백마고지를 빼앗기 위해 엄청난 양의 포탄을 고지에 쏟아 부었다. 10일간 양측은 무려 약 30만에 달하는 27만4,954발(국군과 유엔군 21만9,954발, 중공군 5만5,000발)을 퍼부었다. 실로 엄청난 양이 아닐 수 없다. 하루에 평균 2만7,000발 꼴이다. 여기에 유엔공군의 폭격까지 더해졌다. 유엔공군은 754회나 출격해 백마고지 일대의 중공군 진지를 초토화시켰다. 그 결과 395고지는 나무 한 뿌리, 풀 한포기 없는 민둥산이 됐다. 그 결과 산의 높이가 1미터 정도 낮아졌다. 전투를 끝내놓고 보니 395고지는 치열한 전투와 포격으로 허옇게 변해 있었다. 멀리서 보니 그 모습이 마치 ‘백마(白馬)’가 누워있는 형상으로 보여 이후 백마고지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 따라서 승리의 주역 9사단도 덩달아 ‘백마부대’의 별칭을 갖게 됐다.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로 9사단은 한국군 중 ‘가장 믿음직하고 잘 싸우는 부대’가 됐다. 9사단의 백마고지 전투는 휴전회담 이후 38도선 부근의 캔자스(Kansas)선 일대에서 공산군과 국군 및 유엔군이 마지막 자존심을 걸고 벌인 치열한 고지쟁탈전에서 얻은 값진 승리였다. 그런 점에서 백마고지 전투는 고지쟁탈전의 백미였다. 그리고 그 명성은 월남전까지 이어졌다. 백마부대의 신화였다.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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