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구 선생의 삶과 사상을 통해 근현대사를 이해하고 통일을 지향하고자 건립된 기념관 전경.

9월 중순의 하늘은 더없이 파랗고 높다. 청명하다 못해 시리게 펼쳐진 가을하늘 아래로 백범 김구 선생의 기념관을 만난다.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그의 민족혼이 기념관 전체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당당한 그 모습이 효창원의 중심을 잡고 서 있었다.

백범김구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길에 먼저 마주치는 곳은 선생의 묘소. 일본 경찰에 쫓기느라 임종도 지키지 못했던 아내와 합장된 곳이다. 죽어서도 삼의사를 바라보고 싶다는 선생의 평소 바람에 따라 삼의사 묘역이 보이는 조금 높은 곳에서 자신이 이끌었던 한인애국단과 신민회 의·열사가 누운 자리를 지긋이 품고 있었다.

참배객을 뒤로하고 내려와 조금 더 걸어 ‘백범김구기념관’으로 들어선다. 그곳에서 트레이드마크인 둥근 안경을 쓰고 인자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언제든 일어나 손을 맞잡아줄 것처럼 생동감 넘치고 인자한 모습이다. 선생의 동상 뒤로 걸린 태극기는 마치 선생의 옷처럼 어우러져 선생이 생전 ‘나의 소원’이라 말했던 ‘자주 독립’을 떠올리게 한다.

 

▲ 기념관 입구로 들어서면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관람객을 반긴다.

선생의 인자한 미소에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니 전시실 입구에 걸린 ‘나의 소원’이 선생의 육성으로 들리는 듯 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전시관은 김구 선생의 출생부터 서거까지 선생의 전 인생을 펼쳐놓았다. 선생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조선의 시간과 함께했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단체나 활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1, 2층으로 분리된 전시관을 따라가다 보면, 선생의 삶을 기록한 것인지 한국 근현대사를 기록한 것인지 착각마저 든다.

1층 전시실에는 성인이 모습으로만 익숙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선생의 청년 시절을 만날 수 있다. 선생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열일곱 나이에 매관매직의 부당함을 목격하고 그때부터 더 바르고 강한 조국을 만들기 위해 동학운동에 참여하는 등 앞으로 나섰다. 황해도 치하포에서 명성황후 시해의 책임을 물어 일본인 육군중위를 처단한 것도 약관의 나이였다.

혈기 넘치는 청년이었던 선생이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는 어머니의 헌신이 있었다.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선생을 비롯해 독립운동가를 위해 한밤중 쓰레기통을 뒤져 아들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주린 배를 채우는 등 ‘임시정부의 어머니’로 불린 또 다른 영웅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늘 애틋했던 선생이 어머니의 동상 세우기를 추진했으나 그 자신은 완성을 보기 전에 서거하고 말았다. 기념관 1층 전시실에 여사의 동상이 놓였는데, 아름다운 모습의 다른 동상과는 달리 허리춤을 질끈 묶고 동냥 바가지를 들고 서 있는 여사의 모습이 너무나 사실적이라 마음이 아프다.

2층은 선생의 청년기 이후의 삶을 펼쳐 놓는다. 2층 전시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은 선생이 독립을 이루기 위해 발로 뛰었던 모든 곳이 나열돼 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선생의 발자취를 떠올리게 했다. 선생은 독립운동가의 횃불이었고, 굳건한 버팀목이었다.

2층 전시실 초입에는 대한민국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의 활동을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3년간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을 맡으면서 주요 인사를 보호하고, 일제 밀정을 찾아 설득하거나 처단하며 임시정부를 수호한 활동이 그려졌다.

이곳에서는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길 수 있다. 선생이 조직한 한인애국단에서 활약한 두 의사는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확신과 용기를 심어주었고, 갈라지기 시작한 독립운동 세력을 다시 결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기념관에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을 누렸으나 선생이 그토록 열망했던 ‘자주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흉탄에 서거하시기까지 독립을 향한 선생의 절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역사교과서를 읽듯 덤덤히 관람하다가 마음이 울컥해지는 것은 선생의 그 마음이 전해졌기 때문이리라.

 

▲ 효창원 내에 마련된 ‘삼의사의 묘’. 아직 비가 세워지지 못한 안중근의사의 묘가 왼쪽으로 보인다.

기념관 왼편의 효창원은 조국 독립에 목숨을 바친 선열을 품고 있다. ‘삼의사의 묘’에는 4기의 봉분이 자리하고 있는데, 묘비가 세워지지 않은 한 곳은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의사의 자리다. 안 의사는 아직도 조국이 아닌 찬 땅의 지하에서 조국의 맑은 하늘과 따뜻한 햇살을 그리워하고 있을 터다.

효창원은 모셔져 있는 순국선열의 치열했던 생전과 달리 평화롭고 아늑하다.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들른 후손들의 작은 대화와 옅은 웃음소리가 원내에 낮고 부드럽게 깔려 선열의 고단하고 핍박받던 삶을 달래주는 듯하다.

기념관은 우리가 더는 볼 수 없는 그의 삶과 정신을 고스란히 담았다. 기념관에서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에 마음이 저리고, 그의 조국 사랑에 감동하고, 끝내는 굳은 애국심을 마음 한쪽에 쌓는다. 

 

 

▲ 순국선열의 묘소와 임정요인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선생,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 김구 선생 등 7인의 순국선열 영정을 모신 의열사가 있는 효창원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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