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디디는 곳 어디든 그곳은 길이다. 그 길을 사박사박 걷다보면 산책도 되고, 여행도 되고 마중도 되고 기다림도 된다. 먼지가 풀풀 나는 흙 길은 아스팔트로 바뀌었지만, 정갈히 다져놓은 길에서도 갖가지 생명이 솟아 올라오던 그 흙 길이 그리워진다. 길을 찾는 것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걸으면서 삶에 한줄기 색바람(이른 가을에 부는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 싶은 그 마음은 모두가 같을 듯하다.

 

대전 대청호 오백리길

 

 

마음에 환기가 필요해 걷고 싶을 때에는 가벼운 운동화에 편한 복장으로 나서 아무 방향으로든 걷기만 하면 도보여행이 되겠지만, 도시의 소음과 걷기보다는 아름다운 자연 한가운데로 난 소소한 한줄기 길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철썩이는 파도를 끼고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걷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내륙지방에 사는 사람에게 어디 그게 쉬운 일이던가. 육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풍경은 산과 호수다. 호수 주변엔 반드시 산이 있다. 산과 호수를 품고 있는 옛 길들은 큰 욕심 내지 않고 겨우 한 두 사람 정도가 지나갈만한 폭에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져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르게 뻗어 있다.

대청호 오백리길이 딱 그런 길이다. 대전 동구와 대덕구, 충북 청원, 옥천, 보은에 걸친 오백리 둘레길은 지금 쓰는 단위로 하면 약 220km.

너무 길어 21구간으로 쪼갰다. 그중 19구간의 가을은 노랗게 핀 억새로 눈이 부시다.

걷다가 지치면 고요하고 한적함이 넘쳐 평화로운 대청호를 바라보며 숨을 고른다. 잔잔히 미동도 없는 푸른 수면을 바라보며 길을 출발할 때 찾고자 했던 평안을 찾는다.

길은 끝이 없다. 그래서 재촉하지 않는다. 걸을 수 있을 만큼 걷고, 걷고 싶은 만큼 걷다가 지치면 어디든 주저앉아 쉬다가 다시 출발할 수 있다. 길 위에서는 항상 시작이다.

 

경북 문경새재 과거길

 

 

새들도 날다가 쉬어간다는 높고 험한 문경새재는 지금 가장 아름다운 옛길로 이름이 높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때 이후로 약 500여 년 동안 한양과 영남을 잇는 가장 큰 길이었다. 당시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고개는 추풍령, 문경새재 그리고 죽령이 있었으나 문경새재가 가장 빠른 길이었다.

문경새재는 과거시험 치는 선비들이 유독 고집했는데, 당시 선비들 사이에 추풍령은 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진다는 우스개소리가 있어 문경새재를 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6.5km거리의 과거길은 1관문인 주흘관에서 시작한다. 길이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듯 시원한 바람이 훑고 지나가면 잘 다져진 흙길을 느릿느릿하게 꾹꾹 밟고 걷는다. 천천히 묵직하게 걸으며 마음 속 근심을 길에 묻어버린다.

쉬엄쉬엄 걷다보면 어느새 제2관인 조곡관에 도착한다. 급격하게 좁아지고 거칠어 옛길 정취가 물씬 풍기는 길이 시작되는데 길가에는 온갖 나무가 우거졌다.

새재의 과거길은 제3관문인 조령관까지 가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 깊어지는 숲 속에서 청량한 숲 냄새가 근심을 비워낸 가슴속에 채워진다. 큰 시험을 앞둔 선비들에게 용기를 줬던 새재 길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휴식과 응원을 보내고 있다.

 

부산 해운대 삼포길

 

 

해운대해수욕장의 시원한 파도소리를 출발신호 삼아 가벼운 걸음으로 출발해 삼포길의 첫 번째 포구인 미포. 소를 닮은 ‘와우산(臥牛山)’의 맨 아랫부분에 자리해 있어 꼬리 ‘미’를 써서 미포다.

미포를 지나면 월출이 아름다워 대한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달맞이언덕이 다소곳한 모습으로 솔 향을 내뿜는다. 달맞이길과 바다 중간의 해변 언덕에 조성된 숲길인 ‘문탠로드’가 있다.

두 번째 포구는 푸른 뱀의 포구라는 뜻을 가진 ‘청사포’다. 아주 오래전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명을 다했는데, 이를 안타까워한 용왕이 푸른 뱀(청사)을 보내 부인과 남편을 상봉시켜줬다는 애절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세 번째 포구인 구덕포가 보이면 같이 걷는 사람들과 다정한 격려의 말을 속삭여도 좋다. 해운대 삼포길은 도심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시골 어촌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푸른 바다와 솔내음 가득한 해변길을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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