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인천 앞바다로 들어오는 맥아더 장군.

6·25전쟁의 최대 변곡점은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북한 김일성의 남침 이후 국군과 미군은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전선은 계속 남쪽으로 밀렸다. 그렇게 해서 밀려난 곳이 낙동강전선이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국군과 미군이 싸우고 있는 뒤에는 넘실거리는 남해바다가 있었고, 앞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8월 15일까지 전쟁을 끝내라”며 다그치는 김일성의 독전명령에 따라 공세를 늦추지 않는 북한군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죽느냐, 망명이냐”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해외에 망명정부를 수립하든지 아니면 남해바다에 수장(水葬)될 때까지 끝까지 싸우다 죽느냐의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됐다. 하지만 정부와 국군은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후자를 택했다. 북한군에게 결코 항복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외망명도 절대로 안 된다는 단호한 결정이었다. 워커 미8군사령관의 낙동강 사수명령처럼 오로지 죽음으로 맞서는 ‘결사항전’뿐이었다.

 

대한민국 구한 대담한 작전

국군과 싸우고 있는 낙동강 전선의 미군 상황도 그렇게 좋지 않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파상공격에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군사강국 미군도 속수무책이었다. 한국에 미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한 다음부터 미국은 우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4개 사단 중 3개 사단을 한국전선에 투입했으나, 전선 상황은 호전되지 않고 있었다. 미군의 전력상, 해군과 공군력은 북한군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지상병력은 여전히 절대 부족상태였다.

한국전선의 지지부진한 상황을 보고 가장 답답했던 사람은 한국전선에 대한 총책임을 지고 있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이었다. 맥아더는 서울이 함락된 다음날인 6월 29일, 한국의 전쟁 상황을 둘러보고 전세를 역전시키고 대한민국을 구할 ‘대담한 작전’을 구상했다. 서울의 배후에 상륙작전을 실시해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것이었다.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서울은 교통의 중심지로서 낙동강전선의 북한군에게 병력과 병참물자를 보내려면 반드시 거쳐야 되는 길목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러기에 서울은 상징적인 의미도 컸다.

맥아더에게 서울의 확보는 여러모로 유리했다. 미 본토에서 대규모 증원 병력이 온다 해도 낙동강에서 유엔의 전쟁목표인 38선을 다시 회복하려면 최소 미군 10만 명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그렇다고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방법은 적의 허를 찌르는 창의적인 작전뿐이었다. 그것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탈환하고, 이어 38도선으로 돌진한다는 계획이었다. 맥아더는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이 밀리는 8월 중순의 위급한 상황에서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완성했다.

 

자랑스런 우리 육군·해병대의 힘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을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제한이 뒤따랐다. 먼저 워싱턴과 낙동강전선을 책임지고 있던 워커 장군이 불안스러워 했다.

워싱턴도 인천은 상륙작전을 하기에 위험하다고 했다. 또 상륙작전은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전인데 상륙작전을 수행할 병력과 시간이 부족하다고 했다. 상륙작전에 쓰일 여러 가지 장비도 준비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천지역의 북한군에 대한 정보인데 절대 부족했다.

그럼에도 맥아더는 차분히 해결해 나갔다. 워싱턴의 군 수뇌부를 도쿄로 초청해 설득했다. 그 결과 미 합참과 대통령이 작전을 승인했다. 이어 맥아더는 불안해하는 워커를 달랬다. 낙동강전선에서 미 해병대의 작전공백을 메우기 위해 인천상륙에 투입될 미7사단 1개 연대를 부산 앞바다에 대기시켰다가 낙동강 전선이 위험해지면 바로 투입하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워커도 안심했다. 다음은 미7사단의 부족한 병력을 한국 학생들과 장정들로 메웠다. 이른바 ‘미군 속의 한국군’으로 알려진 카투사다.

인천지역에 대한 북한군 정보는 우리 해군에 맡겨졌다. 손원일 해군총장은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인천상륙작전에 정보 수집을 전달받고, 즉각 시행에 옮겼다. 그때가 8월 중순경이었다. 손원일 총장은 해군 정보국장을 첩보부대장으로 임명하고, 영흥도로 침투시켜 월미도와 인천지역에 대한 적의 해안포 위치와 방어 상태를 파악해 유엔군사령부에 알려줬다.

인천상륙작전에는 한국 해병대와 육군17연대가 참가했다. 해병대는 통영상륙작전에서 뛰어난 용맹으로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조직이고, 17연대는 화령장 전투에서 북한군 2개 연대를 궤멸시켜 전 장병이 1계급 특진을 받았던 ‘자랑스러운 육군부대’였다.

상륙작전 당일 우리 해군 함정 15척도 다른 유엔 7개국 해군과 함께 당당히 참가했다. 모두 261척이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인천을 되찾고, 이어 서울을 탈환했다. 그 선봉에는 국군 해병대와 육군 17연대가 있었다. 북한군에 의해 철옹성 같았던 낙동강 전선도,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맥없이 무너졌다. 낙동강에서의 대반격이 시작됐다. 이 모든 것이 맥아더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뜨거운 피와 땀을 바친 숨은 주역들이 일궈낸 쾌거였다.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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