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게 가라앉은 노인복지센터의 공기를 헤치고 온기를 퍼트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스피커를 꺼내고 신문을 펼치고 스트레칭과 발성을 하며 스스로 기합을 넣으며 준비가 한창이다. 복지센터 어르신들 앞에서 웃음치료를 준비하는 김대화 씨다.

다소 무기력하게 앉아 계시던 어르신들은 그가 나타나자마자 그를 알아보곤 저마다 인사를 건넨다. 그는 센터가 떠나가라 ‘안녕하시냐’ 묻는 것도 모자랐는지 어르신 한 분 한 분과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리고 때로는 안아드리기도 하면서 눈을 맞추고 인사했다.

여기까지는 리허설. 그의 본격적인 ‘1인 공연’이 시작됐다. 신나는 음악을 틀고는 어르신들과 가벼운 몸동작으로 시동을 걸더니, 함께 소리 지르고 웃고 노래하고 대화했다. 잔잔했던 그곳의 공기가 점점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어르신들의 표정은 이제 함박웃음이다.

 “결혼을 일찍 했어요. 어린 나이에 한 가정을 책임지게 됐지만, 생계가 막막했죠. 그때 울산보훈지청에서 보훈가족에게 주어지는 ‘채용지원’을 알게 됐고, 큰 기대 없이 이력서만 제출해 놓았는데 현대자동차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입사 통보를 받았을 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죠.”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막막하던 젊은 시절 울산보훈지청의 ‘보훈가족 채용지원’제도가 큰 희망이 됐다. 생각지도 못했던 현대자동차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그때 그는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기회를 준 국가와 회사에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하시고 국가유공자가 되신 아버지께도 물론이다.

 “보훈가족으로 이렇게 큰 도움을 받고 보니 목적이 없는 감사한 마음이 생겼고, 내가 받은 만큼 어딘가에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입사하자마자 사내 ‘보훈회’에 들어가 봉사활동을 한 지가 15년이 넘었어요. 그러던 중 웃음치료를 접했고요.”

그는 2년 전 회사에서 시범적으로 만든 ‘웃음치료’ 수업에 단순 호기심으로 참석했다가 큰 매력을 느꼈다. 그 수업을 통해 나 자신도 그동안 즐거움 없이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남을 위해. 또한 자신을 위해 웃음치료 공부를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아주 힘들었다.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도 노래하는 것도 주목받는 것도 어색하기 그지 없던 그였다. 끼가 넘치는 동료들과 팀을 이뤄 그들이 하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고 배워나갔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그는 무표정이던 어르신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생각하면 멈출 수가 없었다.

주·야간 교대근무를 하는 그는 주간 근무일 때는 오후에 아이들을 만나고, 야간 근무일 때는 오전에 어르신들을 만난다. 주말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출석도장을 찍다시피 봉사에 전념한다. 봉사도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는 것이라며 웃는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오히려 제 삶에 더 큰 활력소가 됐습니다. 하루에 한 번 웃기도 어려운데 저는 매일매일 한 시간씩 즐거우니까요. 웃다 보니까 웃는 삶이 됐고, 제가 웃으면 주변도 웃고 주변이 웃으면 또 제가 웃고, 이렇게 선순환이 돼요.”

 

 

항상 봉사활동을 해 왔지만 웃음치료를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는 그는 지난 6월 그 노력과 정성을 인정받아 국가보훈처장 표창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울산보훈지청에 보훈가족으로써 웃음치료 등 재능기부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 둔 상태다.

 “인정받기 위해 하는 일은 아니지만, 알아주시니 더욱 감사한 마음이 생겨 이 마음 그대로 돌려드릴 생각입니다. 올해는 국가유공자분들 앞에서 웃음과 행복을 전해드리려 합니다. 울산보훈지청과 협의가 잘 돼서 꼭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께 웃음과 건강을 찾아드리고 싶어요.”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실천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요즘처럼 개인의 성취가 중심인 사회 안에서 주어진 것에 고마움을 느끼며 사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사회구성원으로 떳떳하게 살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도움을 다시 필요한 곳으로 보내고 있는 그의 삶이 더욱 당당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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