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일 추념식에서 국가유공자증 받은 박용규 6·25참전용사

 

6·25참전용사로, 지난 현충일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유공자증을 직접 받은 박용규(88)씨는 그날 이후로 ‘유명인사’가 됐다.

불편한 몸으로 추념식에 참석했던 박씨가 국가유공자증을 받고 자리로 돌아오면서 문 대통령이 부축하는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됐다. 새로 국가유공자가 된 이들 중 추념식에 직접 참석하는 것도 영광인데, 식장에서 대통령의 부축을 받으며 따뜻한 위로의 인사를 나눈 것이 알려지자 이웃과 친척으로부터 전화가 쇄도한 것이다.

그는 다시 15일 청와대에서 이뤄진 오찬에 초청받아 문 대통령 바로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게 됐다.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도 한눈에 알아보고 손을 잡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이제야 전투 중에 먼저 간 동지들에게 미안한 감을 덜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전우들의 희생에 대한 보상을 제가 대신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차대대 운전병이었던 그는 인터뷰 과정에서 쏟아지는 빗속에서 수렁에 빠진 전차를 건져내기 위해 애쓰다 목숨을 바친 중대장 이야기를 길게 했다. 그는 이제 중대장을 다시 만나 자랑스럽게 이번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으리라.

그날의 여운이 아직 남은 듯 박씨는 대통령의 손길과, 국가유공자를 대하는 대통령 부부의 진심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대통령께서 ‘당신들이 주인공이다’하며 손을 잡아주시고 위로해 주시는데 정말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그날 오찬에 참석했던 보훈가족 모두가 정말로 감격했습니다.”

현충일 추념식장, 맨 앞자리에 앉은 신입 국가유공자 박용규씨. 그가 이번 호국보훈의 달의 주인공이었다. 그에게, 국가유공자가 중심이 된 이번 호국보훈의 달은 특별한 의미로 남았다.

 

 국가유공자 위해 선풍기 기부한 임택준 월남전 참전용사

 

세상을 보는 눈이 닫힌 지 10년이 넘었다. 당뇨에 매주 세 차례 신장 혈액투석까지 받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 유일한 수입원인 국가유공자 연금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는 임택준 씨 이야기다.

월남전 참전용사인 그는 많지 않은 국가유공자 연금의 절반 이상을 모아 더 어려운 형편의 이웃을 돕고 있다.

“저희도 어려운 시절을 오래 겪었어요. 그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보니까 그 시절을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죠. 어렵게 살아본 제가 더 어려운 사람을 살피고 돕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에요.”

그가 이렇게 선행을 베풀며 살고 있는 것에는 그의 부인 양정숙 씨의 공이 크다. 그는 남편의 뜻에 선뜻 동의하고 알뜰한 살림으로 기부액을 늘리는 동시에 남편의 혈액투석 등 병간호까지 훌륭히 해내고 있다.

그의 첫 번째 기부는 지난 2013년. 그는 자신을 부축하는 부인의 안내로 광주 광산구청과 연을 맺고 선풍기 100대를 후원했다. 그 후 소방관 자녀를 위한 장학금 500만 원,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에게 보낼 이불과 선풍기, 연탄 등을 매해 후원하게 됐다.

작년 여름 부인에게 팔이 골절되는 사고가 있었는데 광주지방보훈청이 성금을 마련해 줘 부인의 치료와 재활에 큰 도움을 받았다. 고마운 마음에 부부는 다시 사정이 어려운 국가유공자를 위한 선풍기 100대를 내놓았다.

“국가유공자로서 같은 처지의 어려운 보훈가족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지요. 몸이 아파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작은 힘이지만 꾸준히 보태고 싶어요.”

거동이 불편하고 앞이 보이지 않아도 나누고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그는 베푸는 삶이 인생을 윤택하게 하고 사회의 자양분이 된다는 것을 안다. 이 부부의 선한 마음과 실천이 또 다른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다.

 

 참전 유공자 위로연에서 ‘다시 만난 아버지’ 이야기한 정정자 씨

 

다섯 살이 되던 해 여름 카투사로 전쟁터에 나간 아버지는 첫 휴가 때 초콜릿을 손에 쥐어주며 가“이제 먼 곳으로 가게 될 거야, 동생 잘 돌볼 수 있지?”라고 당부하셨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렇게 돌아선 후 반세기가 지나고 나서야 차디찬 유골로 돌아온 아버지와 조우한 정정자 씨를 6·25전쟁 국군 및 유엔군 참전유공자 위로연에서 만났다.

“아버지는 특별히 저를 예뻐해 주셨어요. 먼 곳으로 떠난다고 말씀하시던 날 제가 아버지 손을 잡고 ‘가지마라’며 울고 떼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게 영영 이별이 될 줄은 몰랐어요.”

고 정준원 일병은 1950년 7월 입대했다. 국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고전하고 있던 무렵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학교를 다닌 그는 영어를 잘 해 카투사로 미 육군7사단에 배치됐다. 같은 해 11월, 미 7사단은 장진호에서 격전을 치렀고 그는 그곳에서 전사했다.

남겨진 가족의 삶은 힘겨웠다. 어머니마저 서른 여덟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 어린 동생과 남겨진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너는 여자지만 꼭 대학공부까지 해야 한다”고 당부한 말을 지킬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그는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결혼을 하면서 비로소 삶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늘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가슴에 묻어둬야겠다고 마음을 접고 있던 때, 국방부에서 아버지의 유해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의 유해를 만났을 때, 엄마 생각이 나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토록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엄마가 불쌍했고, 그렇게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가 불쌍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마땅히 할 일을 하셨다고 생각하니 이젠 오히려 자랑스러워요.”

지금 그의 아버지는 당신의 손자, 증손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특히 그의 손녀딸들이 증조할아버지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모른다고.

그의 아버지는 비록 젊은 나이로 참전해 조국을 위해 희생하고 차디찬 곳에 66년간이나 잠들어 있었지만, 그의 후손과 조국이 있어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을 듯하다. 

저작권자 © 나라사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