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9월 9일 화령장지구 전투 전승기념행사에서 6·25참전유공자들이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다.

 화령장(化寧場) 전투는 1950년 7월 17~21일까지 국군이 소백산맥 일대에서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국군17연대가 상주로 진출하려던 북한군15사단 예하 2개 연대를 기습 공격해 궤멸적 타격을 입혀 대승을 거둔 전투다.

화령장 전투는 국군6사단 7연대의 동락리 전투와 함께 ‘지연작전 2대 대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부에서는 동락리 전투와 화령장전투를 승리로 이끈 연대장 이하 전 장병에게 국군 창설 이래 최초로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수여했다. 화령장 전투는 북한 남침 이후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으로 밀리던 상황에서 국군이 거둔 최대의 값진 승리였다. 이 전투로 17연대는 ‘무적불패’의 부대로 거듭나게 됐고, 인천상륙작전에 선발되는 영광을 안게 되기도 했다.

국군17연대는 1948년 여수에서 일어난 14연대 반란사건을 진압하는데 가장 전공이 컸던 12연대에서 최정예 요원을 골라 창설한 부대였다.

 

미군 참전 막으려는 ‘속도전’ 좌절

17연대는 대전에서 대통령 경호 및 대전방어사령부 임무를 수행하던 중 미 지상군 선발부대로 온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와의 연합작전을 위해 평택으로 진출했다. 화령장 전투는 북한군의 작전계획 변경과 ‘김일성의 특별지시’에 의해 발생했다. 북한 김일성이 전쟁을 계획하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미군의 참전이었다. 그래서 남침계획을 작성할 때 김일성과 소련 군사고문단은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전에 전쟁을 끝낼 계획이었다. 소련 군사고문단은 미군이 한반도에 전개하려면 최소한 1개월 반 정도가 걸릴 것으로 판단하고 1개월 내에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그런데 전쟁은 김일성이 예상했던 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서울을 점령해서 의기양양해 있던 북한군 1군단은 1950년 7월 5일 오산에서 미군을 만났다. 미 지상군으로 한반도에 최초로 전개한 1개 대대규모의 스미스특수임무부대였다. 미군을 본 북한군은 기겁했다. 전차를 앞세워 경부국도를 통해 부산을 점령하려고 했던 목표에 차질이 생겼다. 경부국도에는 미군이 진출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했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남진속도가 자연히 둔화됐다.

북한군 수뇌부와 김일성은 대책마련에 부심했다. 북한군 전선사령관 김책은 기존의 작전계획을 변경했다. 경부국도 상에 배치된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그래서 미군보다 전력이 약한 중부전선 및 중동부전선의 국군을 상대하기로 했다. 그중에서도 괴산-상주-김천-대구로 진출해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국군과 미군을 동서로 분리할 계획이었다. 이때쯤 미군이 참전하고 이에 따라 전반적으로 북한군의 전진속도가 느려터진 것을 보고 김일성도 충주의 수안보까지 내려와서 남진을 독촉했다. “왜 좋은 길로만 가려고 하느냐, 왜 산길로는 가려고 하지 않느냐”며 다그쳤다.

 

“세계대전 보다 통쾌한 전투장면”

그렇게 해서 북한군 2군단 예비로 있던 북한군 15사단이 괴산에서 긴급 투입됐다. 북한군 15사단의 임무는 괴산에서 상주-김천-대구로 진출해 경부국도 상에 배치된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북한군 15사단이 진출하려고 했던 대구는 당시 대한민국 임시수도였다. 대구를 잃고는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북한군은 그 점을 노렸다. 북한군의 판단은 정확했다.

화령장은 충북 보은과 괴산에서 상주로 갈 때 반드시 거쳐야 되는 요충지였다. 그만큼 중요한데 국군은 이곳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뒤늦게나마 화령장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한 육군본부에서 국군17연대를 이곳으로 출동시켰다. 이제 싸움은 국군17연대가 북한군 15사단을 막아내느냐, 막아내지 못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결판나게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국군17연대에게 행운이 따랐다. 북한군 15사단은 두 번에 걸쳐 부대를 상주방향으로 진출하고자 했으나, 두 번 모두 17연대에 의해 크게 피해를 입고, 결국 진출하지 못함으로써 작전에 실패하게 됐다.

국군17연대가 대승을 거두며 성공하게 된 데에는 두 번에 걸쳐 북한군 전령을 생포해 적 상황을 미리 알고, 북한군이 지나갈 곳에 매복을 하고 있다가 기습 공격한 것이 주효했다. 반면 북한군 15사단 지휘부는 “이곳까지 국군이 배치되지 않았을 것”으로 믿고 방심하며 남진하다가 사단 전체가 와해되는 피해를 입게 됐던 것이다.

전투과정에서 17연대 장병들은 그동안 북한군에게 당했던 울분을 이곳에서 모두 풀었다. 특히 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심한 부상으로 도저히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들것에 실려 전투를 지휘하는 투혼을 보이기도 했다. 17연대는 두 번의 전투를 통해 적 사살 606명, 포로 56명, 박격포 36문, 대전차포 9문, 기관총 53정, 소총 1,386정을 획득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전투를 참관한 미 군사고문관은 “내가 1·2차 세계대전을 다 겪었고, 서부활극을 많이 봤지만 이처럼 통쾌한 전투장면은 처음”이라며 “한국군 원더풀”을 연신 외쳤다.

화령장 전투를 통해 대한민국은 다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역전의 17연대 용사들은 낙동강전투를 거쳐 ‘6·25전쟁 최대의 작전’으로 알려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에 대한민국 육군을 대표하여 참가하는 영광을 안게 됐다. 이로써 17연대는 상승무적(常勝無敵)의 연대로 남았다.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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