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1년 5월 중공군이 현리를 무너뜨리고 대관령으로 진격할 무렵 참모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있다.

1951년 5월 중공군이 현리를 무너뜨리고 대관령으로 진격할 무렵 참모들과 함께 회의를 하고 있다.

대관령 전투는 중공군의 2차 춘계공세가 개시된 후 현리 지역의 작전에 실패한 국군 제3군단이 하진부리와 속사리 부근으로 후퇴하고 있을 때, 설악산에서 방어 중이던 국군수도사단이 급거 강릉지역으로 남하해 대관령 일대에서 북괴군 12사단과 중공 제27군의 진출을 저지한 방어전투다.

경강도로(6번 국도)로 진출한 중공군은 대관령을 넘어 강릉을 노리고 있었다. 강릉을 잃으면 공군기지뿐만 아니라 동해안의 보급항도 잃는 것이었기 때문에 강릉을 지키기 위해 전략적·전술적 요충인 대관령을 확보해야만 했다.

이 전투에서 한신 대령의 수도사단 제1연대는 급히 대관령으로 이동했다. 제1연대가 대관령에 도착한지 불과 1시간 만에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전투는 처음부터 고지를 선점한 제1연대의 완승으로 전개됐다. 2차·3차 측면공격도 격퇴하고 대관령을 사수했다. 제1연대는 이 전투에서 1,180명의 적을 사살한 반면 전사자는 12명에 불과했다.

이 전투로 북괴군 12사단과 중공27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오대산 방면으로 물러서게 됐으며 국군수도사단은 곧이어 개시된 반격작전에서 오대산을 탈환한 후 향로봉까지 진출하게 됐다. 중공군은 이때 입은 피해 때문에 휴전에 임박해서야 공세를 펼칠 정도로 전력과 보급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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