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차가운 겨울을 딛고 반드시 찾아와 잠시나마 전국을 물들여 무채색의 대지를 환하게 밝힌다. 봄은, 머무는 것에 욕심내지 않고 곧장 여름을 불러들여 제 자리를 내주고, 아무도 모르는 새 사라진다. 매년 만날 수 있는 봄이건만, 우리는 언제나 그 봄이 처음인 것처럼 설레고 마지막인 것처럼 아쉽다. 아름다운 우리 강산은 어느 곳 하나 빠지지 않고 봄을 맞아 기지개를 켜고, 숨겨두었던 제 속의 온기를 꺼내들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꽃을 피운다.

 

경북 경주 벚꽃

 

 

봄의 시작점에서 매화와 산수유 꽃망울이 톡톡 터지고 나면 벚나무가 앞장서 봄을 알린다. 산자락이며 뚝방, 인적 드문 국도변, 호숫가에 우직하게 서서 하얗고 분홍의 꽃잎을 피워내 그 보드라운 꽃잎을 따뜻한 기운과 섞어 흩뿌린다.

전국의 많은 명소 중 경주는 조금 특별하다. 천마총과 불국사, 석굴암으로 대표되는 천년고도 경주는 봄날의 낭만과 어우러져 고귀한 아름다움을 풍겨주는 듯하다.

경주의 벚꽃은 갖가지 풍경과 어우러진다. 봄이면 경주 전체를 감싸는 벚꽃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김유신 장군묘로 향하는 길이 으뜸이다. 묘로 향하는 동안 하늘에게 한 틈도 내어주지 않을 정도로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그 아름다움을 취하려는 사람들로 꽉 차 정체된 길마저도 황홀경으로 만든다.

김유신 장군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릉원이 있다. 지나쳤다면 돌아와야만 하는 곳이 대릉원, 그러니까 천마총 옆 담장길이다. 오래된 돌담길을 따라 커다란 벚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서 바람이 살짝만 스쳐도 하얀 꽃비를 뿌려준다.

 

인천 강화도 고려산 진달래

 

 

벚나무의 꽃잎이 거의 떨어질 즈음 4월 중순이면 한창 물이 오른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나 산허리를 감싼다. 거리마다 보이는 벚꽃과는 달리 진달래는 산에 올라야만 만날 수 있다.

진달래는 산뜻한 봄꽃이지만 관상용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진달래로 두견주를 빚어 마시기도 하고 꽃잎을 따 화전을 지져 먹기도 하고 뿌리를 말려 차를 만들기도 했다. 진달래는 우리에게 꽃 이상의 무엇이었다. 시인 김소월은 ‘진달래꽃’이라는 시에서 임에 대한 슬픈 정서를 진솔한 정감으로 표현하기 위해 진달래를 썼다.

고려산의 완만한 산등성이를 따라 한 시간쯤 걷다보면 어느새 정상, 진달래 군락지 한가운데 와 있다. 하늘을 향해 쭉 뻗은 앙상한 가지에 활짝 피어난 진달래 꽃잎은 치맛자락에 그대로 그려 넣고 싶을 만큼 곱다.

한참을 홀린 듯이 진달래를 보고 있노라면 햇빛에 투영된 진분홍 꽃잎에 눈이 시리다. 돌아내려오는 길에는 소복하게 떨어진 진달래 꽃잎을 사뿐히 즈려밟아 보는 것도 좋겠다.

 

충북 단양 소백산 철쭉

 

 

철쭉은 봄의 마지막 향연이다. 봄이 어느 정도 왔다 싶은 4, 5월 길거리는 홍자색, 다홍색으로 핀 꽃무더기가 수놓는다.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아도 아무데서나 잘 자라고 때가 되면 꼭 꽃을 피우는 것이 바로 철쭉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별로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철쭉은 눈에 잘 띄지 않고 특별히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가장 선명한 색으로 꿋꿋하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피워낸다.

산은 5월이 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각자의 철쭉을 뽐낸다. 철쭉은 가장 발랄한 색의 꽃을 피워내면서도 도심 속에서 ‘꽃축제’의 주인공으로 나서지 못했던 설움을 산에서 마음껏 풀어낸다.

5월의 소백산은 산철쭉이 소복하게 산등성이를 덮어 마치 철쭉으로 옷을 지어 입혀놓은 모습이다. 소백산 고산지대에 피는 산철쭉은 황매산이나 길가의 철쭉처럼 진분홍빛을 띄지 않는다. 흔히 보던 길가의 화려한 철쭉과는 달리 더 은은하고 부드러운 빛깔의 수수한 모습으로 피어나 등산객을 향해 수줍게 짓는 미소 같다.  

산줄기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어디든 피어난 철쭉을 감상하다보면 우리나라 12대 명산이라는 소백산에 오르는 것이 그다지 버겁지가 않다. 산이 5월에만 선사하는 특별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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