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철수는 중공군 2차 공세에 밀려 북한의 함경도지역에서 북진 중이던 미10군단과 국군1군단이 1950년 12월 14일부터 24일까지 흥남을 통해 실시했던 해상철수 작전이다.

흥남철수에서는 한미 양국 군인 10만 명과 북한주민 약 10만 명이 함께 철수했다. 이를 두고 전사가들은 2차대전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독일 구데리안의 전차군단에 쫓겨 던커크(Dunkirk)에서 영국본토로 해상 철수한 ‘던커크 철수작전’에 비유한다. 차이가 있다면 던커크 철수에서는 군인이 대상이었고, 피난민은 한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함포사격 지원 속 철수작전

흥남철수는 군사상 매우 긴박한 상황에서 벌어졌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하는 국군과 유엔군에게 거대한 해일처럼 밀어닥친 30만 명에 달하는 중공군의 인해전술 앞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작전상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평안도지역에서 북진하던 미8군과 국군2군단은 이미 평양을 공산군에게 넘겨주고 38도선을 향해 육상 및 해상으로 철수 중이었다. 함경도지역에서 북진 중이던 미10군단과 국군1군단은 원산지역이 공산군에게 차단당한 상황에서 부득이 해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해상철수를 책임져야 했던 미10군단 알먼드(Edward Almond) 장군은 10만5천명에 달하는 한미연합군과 1만7,500여대에 달하는 차량 그리고 35만 톤에 달하는 군수물자를 선박에 싣고 해상으로 철수해야 했다. 상급부대인 도쿄의 맥아더 유엔군사령부에서도 12월 9일 “미10군단은 흥남에서 부산과 마산 및 울산으로 해상 철수하여 부대를 집결시키고 미8군사령관 지휘 아래 들어가라”며 해상철수를 지시했다. 맥아더 장군은 장진호에서 미1해병사단이 무사히 함흥에 도착한 12월 11일 흥남 옆에 위치한 연포비행장까지 와서 해상철수계획을 보고받고 돌아갔다. 이때부터 미10군단은 미 극동해군의 협조를 받아 본격적인 흥남철수작전이 시작됐다.

해상철수작전을 책임진 알먼드 미10군단장의 고민은 컸다. 성공적인 해상철수작전을 위해서는 쉼 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지상공격을 막아내야 했고, 10만 명이 넘는 막대한 병력과 수십만 톤에 달하는 장비와 물자를 싣고 갈 선박이 필요했고, 병력과 장비 및 물자를 배에 실을 때 밀려드는 중공군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해군의 함포사격과 공군의 엄호사격이 필요했다. 알먼드는 안전한 해상철수를 위해 흥남 외곽에 3개의 방어선을 설정해놓고 중공군의 접근을 차단하면서 사단별로 철수할 계획이었다. 철수순서는 국군3사단, 미 해병1사단, 국군 1군단지휘부 및 수도사단, 미7사단, 미10군단지휘부 및 미3사단 순이었다. 미 극동해군은 해상철수를 위해 193척의 각종 함정을 동원했다. 항공모함 7척을 비롯해, 전함, 순양함, 구축함, 각종 수송함 등이 동원됐다. 항공모함에 실려 온 함재기만도 약 400여대에 달했다. 어마어마한 전력이 아닐 수 없다.

12월 14일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해상철수작전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장면들이 연출됐다. 함경도지역의 주민들이 피난을 위해 함흥과 흥남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전투현장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었다. 하얀 눈으로 덮여진 순백색의 벌판위로 영하10도를 오르내리는 혹독한 추위와 시베리아의 매서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중공군과 북한군은 먹잇감을 노리고 달려드는 하이에나 같았다. 흥남외곽에 3중 방어선을 친 한미연합군의 대포와 총에서는 연신 불을 뿜었다. 항공모함에서 뜬 함재기들도 공중에서 폭탄을 퍼부으며 가세했고, 해상의 군함들도 거대한 함포사격으로 지축을 울렸다. 평화스럽기만 하던 설원이 갑자기 핏빛으로 변했다.

그 틈새로 피난민들은 죽음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군중 속에는 갓난 애기를 안고 있는 산모, 머리와 등에 봇짐을 가득지고 있는 아낙네들, 초라한 세간을 얼기설기 지게에 얹혀 지고 오는 농부들, 괴나리봇짐을 조그마한 가슴에 품고 오는 소녀들, 행여 놓칠세라 어린애들을 업고 안고 걸리고 오는 주름살 파인 할머니들, 그 뒤로 멋모르고 따라오는 가축들이 그저 ‘정겹게만’ 보였다.

알먼드 미10군단장의 고민은 더욱 깊어갔다. 중공군의 공세 속에 해상철수도 어려운 판국에 피난민 문제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미 해군 규정에 민간인을 군함을 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피난민을 태울 선박도 없었다. 병력도 장비를 싣기에도 빠듯해 보였다. 그런데 이제까지 함경도지역에서 함께 싸웠던 국군1군단 지휘관들이 북한주민들을 그냥 버리고 갈 수는 없다고 나섰다. 알먼드가 규정을 들어 이를 거부하자 김백일 군단장을 비롯한 사단장들은 “우리 대신에 북한주민들을 태워 주시오. 우리는 육상으로 적과 싸우며 38도선을 돌파하겠소”하며 버텼다. 미10군단 민사처 고문관으로 있단 현봉학 박사도 미10군단 참모부장 포니 대령을 앞세워 알먼드 장군을 찾아 “그들은 지난 5년 동안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알먼드도 더 이상 규정만 내세우며 버틸 수 없었다. 알먼드는 즉시 상급부대인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다. 맥아더 사령부도 워싱턴에 보고했다. 워싱턴에서는 미군들의 빠른 철수를 고려해 우려했지만, 최종 결정은 현지 사령관에게 일임했다. 이렇게 해서 북한 주민들은 흥남에서 철수하는 배에 탈 수 있게 됐고 역사적 흥남철수작전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게 됐다.

트루먼 “가장 훌륭한 X-마스 선물”

최초 철수계획에 피난민들은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박에 여유가 없었다. 군인과 장비 및 물자를 실은 빈 공간에 피난민을 태우거나 화물선에 피난민들을 태워야 했다. 모든 선박들이 총동원됐다. 이때부터 눈물겨운 장면들이 쏟아졌다. 먼저 출발해야 했던 김백일 1군단장은 흥남 부두 근처에서 “배에 태워 달라”며 찬송가를 부르고 있던 50여 명의 여학생들을 발견하고, “신이 그대들을 버리지 않듯이 나도 그대들을 버리지 않겠다”며 그들에게 군복을 입혀 국군대열에 끼여 배에 태웠다.

한미연합군이 차례로 흥남부두를 통해 빠져나가자 중공군은 기를 쓰며 공격해 들어왔다. 공중에서는 항공모함에서 뜬 함재기들의 굉음이 귓전을 때리고, 해상에서는 맹렬한 함포사격이 이어지고, 지상에서는 적의 접근을 막아내는 혈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피난민들은 생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구로 몰려들었다.

피난민을 싣기 위해 미 해군이 동원한 각종 선박 중에는 7,607톤급의 미국 화물선 ‘매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도 있었다. 항공유를 하역하다 급히 흥남항으로 출동한 빅토리아호는 40여명의 사람밖에 실을 수 없음에도, 1만4,000명의 피난민들을 실고 3일간의 항해 끝에 부산을 거쳐 거제도까지 왔다. 1만4,000명이 배에 타는 데만 꼬박 13시간 40분이 걸렸다. 더욱이 이 배에는 객실이 없기 때문에 배의 모든 화물창고와 갑판 사이의 공간에 사람들을 차곡차곡 적재해야 했다. 화물선이라 배에는 음식도 물도 없었고, 의사도 통역도 없었다. 배안은 영하인데도 난방장치나 전기가 없었다. 추위를 견디려면 서로의 체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강한 추위에 이빨이 저절로 딱딱거렸다. 화장실도 없어 겨우 쪼그려 앉은 그곳에서 용변을 처리해야 했다. 배안에는 악취와 추위, 그리고 배고픔과 목마름만 있을 뿐이었다. 3일 동안 영하의 추위 속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살아난 것이 기적이었다. 거제 도착 후 그 배는 악취가 심해 청소를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간의 생명은 끈질겼다. 5명의 산모가 그 속에서 아이를 낳았다. 미국 선원들은 한국의 대표 음식인 김치에다 태어난 순서대로 ‘김치1’에서 ‘김치5’까지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흥남철수작전은 대성공이었다. 12월 24일 흥남철수의 성공소식을 보고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내가 여태까지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 중에서 가장 훌륭한 선물”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흥남철수작전은 참혹한 전쟁 속에서 꽃피운 인간 휴머니즘의 승리였다. 그런 점에서 흥남철수작전의 영웅들은 작전에 참가한 한미 장병들과 피난민을 수송한 모든 선원들, 그리고 오로지 자유를 찾아 탈출한 북한주민들이었던 것이다.

흥남철수작전이 진행중인 부두에서 함경도 지역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이 정박중인 전함에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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