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부터 새로운 기획시리즈 ‘6·25전투현장과 호국 영웅들’을 선보인다. 이번 시리즈는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전투를 중심으로 전장의 이야기, 그 속에 살아 있는 호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전투현장의 치열하고 생생한 모습에서부터 전투에 참가한 영웅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함께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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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스탈린그라드전투와 함께 세계 2대 동계전투로 유명하다. 또한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로 알려졌다. 이 전투는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 제9병단 예하 12개 사단 규모가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벗어나기 위해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간에 걸쳐 후방으로 공격을 하며 전개한 철수작전이다.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에서 흥남까지의 125km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에 2만 5,000명의 병력이 길게 배치되어 있었다.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의 유담리에서 하갈우리와 고토리, 그리고 진흥리를 거쳐 흥남까지 중공군의 공격, 추운 날씨, 협곡으로 이루어진 좁은 도로, 곳곳에 중공군이 설치한 장애물을 극복해야 했다. 중공군은 길게 늘어진 미 해병대를 수적으로 5배가 넘은 병력을 이용해 중간 중간마다 절단해 놓고 하나씩 격파해 완전히 섬멸한다는 전략이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적보다 무서운 추위와의 전쟁

그렇다면 미 해병 제1사단은 왜 이곳 오지의 땅 장진호까지 왔을까? 미 해병 제1사단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의 북진 때 북한의 원산항으로 상륙해 서부전선에서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을 향해 북상중인 미 제8군과 연결을 유지하기 위해 장진호 계곡을 따라 강계방면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은 국군과 유엔군의 승리로 끝날 것이 분명했다. 이 또한 맥아더 장군의 야심찬 전략에서 나왔다.

하지만 장진호를 거쳐 강계방면으로 진군하던 미 해병대는 그곳에서 송시륜(宋時輪)이 지휘하는 중공군 제9병단의 12개 사단으로부터 포위 공격을 받고 위기에 직면했다. 해병대에게는 모든 것이 불리했다. 특히 수많은 전차와 대포를 보유하고 있던 미 해병대에게 이곳 지형은 모든 면에서 불리했다. 이 지역은 평균 2,000미터 이상의 높은 산들이 남북으로 뻗어 낭림산맥을 이루고 있고, 해병대가 돌아가야 될 흥남으로 이어지는 길은 날카로운 경사면에 좁고도 길게 늘어진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어 미 해병대에게 불리했다. 더욱이 중공군은 해병대가 지나갈 도로 곳곳에 통나무 등을 쌓아 장애물을 설치해 놓고 산등성이에서 밑에 있는 미 해병대를 인해전술로 공격해 왔다. 쏴도쏴도 중공군은 끝없이 밀려왔다. 그것이 바로 장진호전투였다.

장진호지역의 추운 날씨도 미 해병대를 괴롭혔다. 야간에 영하 35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에 바람은 매섭고 강하며, 많이 내리는 눈은 가끔 눈보라로 변하며 눈앞을 가려 작전에 지장을 줬다. 이런 극심한 추위 속에선 무기와 장비도, 음식물도, 사람의 살과 피도 얼어버리게 했다. 중공군과의 전쟁도 전쟁이었지만, 더 급한 것은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장진호의 혹독한 날씨는 모든 것을 얼어붙게 했다. 만주에서 불어오는 황량하기 짝이 없는 눈보라와 찬바람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산봉우리를 할퀴듯이 지나가면, 주변의 산골짜기는 눈으로 뒤덮였고, 강물은 꽁꽁 얼어붙었으며, 가파른 능선의 바위는 온통 얼음으로 번들번들해졌다. 적보다 추위가 무서웠다. 대포도 추위에 무력했다. 대포를 움직이는 화학가스가 얼어붙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탄약도 발사되지 않거나 발사되어도 포신이 재빨리 제자리에 돌아오지 않고 엉금엉금 돌아왔다. 효과적인 화력지원이 불가능했다. 땅을 파는 장비도 돌같이 얼어붙은 땅에는 무용지물이었다. 따라서 병사들은 동태같이 된 시체를 쌓아 방어진지를 만들고 그 뒤에서 중공군과 싸워야 했다. 추위는 중공군에게도 무서운 존재였다. 방한복이 없는 중공군은 북한지역의 주민들에게서 빼앗은 솜이불을 지고 다니며 추위를 버티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이불을 뒤집어 쓴 중공군 병사들이 매복하다가 동사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럼에도 불리한 쪽은 미 해병대였다. 미 해병 제1사단은 2만 5,000명의 병력으로 중공군 12만 명을 상대해야 했다. 무기와 장비가 우수하다고 해도 혹독한 추위와 날카로운 산등성에 의지해 형성된 길게 늘어진 협곡의 좁은 도로는 미 해병대에게 절대 불리했다. 공중으로의 철수가 아닌 지상으로의 후퇴는 불가능해 보였다. 미 중앙정보국장도 중공군에게 포위된 미 해병 제1사단의 포위된 상황판을 보고 “오직 외교적인 방법만이 맥아더의 우측 전선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때 상급부대에서는 스미스 해병 제1사단장에게 공중 철수작전을 하도록 권유했으나, 그럴 경우 해병대의 수많은 전차와 1,000여 대의 차량 그리고 막대한 장비를 포기해야만 했던 스미스 사단장은 그럴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장비와 무기를 내팽개치고 도망가는 듯한 해병대의 초라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결책은 하나였다. 비록 중공군에게 포위됐지만 그곳을 뚫고 지상으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후방으로의 공격작전이었다. 그것도 전사한 동료, 부상자, 그리고 장비들을 모두 가지고 후퇴하는 가장 어려운 작전이었다.

 

위대한 승리, 흥남철수로 연결

장진호 전투는 참혹하고 참담하며 처절했다. 미 해병대는 주로 대대단위로 싸웠다. 소총 대대들은 전방에서, 후방에서, 그리고 측방 등 도처에서 밀려오는 중공군과 끊임없이 싸웠다. 때로는 산등성이에서 행군을 방해하는 중공군을 격퇴하기 위해 빙벽같이 미끄러운 고지를 향해 공격해야 했고, 때로는 중공군이 설치해 놓은 도로의 통나무를 치우는 과정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미 해병대는 낮이나 밤이나 중공군의 기습에 싸우며 후퇴했다. 그들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도 싸웠고, 또 부상자를 싣고 느린 속도로 남으로 이동하고 있는 트럭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싸웠다. 그러다보면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도 잃은 채 얼어붙은 다리의 마비가 서서히 상체로 올라오고 있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병사들은 쓰러지면서 눈 속으로 맥없이 빠져들었다. 동료들이 그들을 일으키고, 흔들고, 고함지르고, 그도 안 되면 발로 차서 다시 걷게 했다. 쓰러진 병사들은 제발 그대로 내버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럴수록 동료들은 그들을 강제로라도 걷게 했다. 살리기 위해서다. 누구도 뒤에 남겨두지 않으려는 뜨거운 전우애의 발로였다.

작전 도중 전사한 시체들도 버리지 않았다. 시체를 야포에 끈으로 매거나 트럭 발판에 결박하거나 트럭의 보닛 위에 싣고 나왔다. 지금은 비록 시체로 변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이야기했던 전우였다. 그런 그를 어찌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마저 어려우면 썰매를 만들어 거기에 시체를 매달고 끌었다. 그렇게 해서 미 해병대원들은 죽은 자나 산 자나 모두 그 죽음의 협곡에서 빠져 나왔다. 미 해병대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미 해병들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함흥으로 내려오는 모습은 숙연하고 장엄하기까지 했다. 아직도 후미에서는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18킬로미터에 달하는 본대의 행렬 속에는 군인과 피난민들이 뒤섞여 있었다. 피난민 속에는 소들의 울음소리와 갓 난 어린애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도 함께 있었다. 눈 위를 걷는 군화소리와 웅웅거리는 무거운 자동차 엔진소리는 생환을 알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였다. 그것은 미 해병대의 승리를 알리는 환호성이었다.

비록 미 해병대는 약 5,000여 명의 희생이 있었지만, 중공군 제9병단 7개 사단의 전투력을 상실케 하여 중공군의 함흥진출을 2주간이나 지연시켜 흥남철수를 가능케 했다. 중공군은 3만 7,500명의 피해를 입었다. 그 여파로 중공군 9병단은 차후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고, 재편성에 들어갔다. 이를 두고 미국의 전사가 마셜(S.L.A. Marshall)은 “장진호 전투는 현대전에서 가장 위대한 공격적 후퇴”로 평가했다. 미 해병대의 뛰어남이 다시 평가받는 계기가 됐다.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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