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독립운동가다. 그러나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고찰 없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민족의 영웅’식의 정의는 안 의사의 심오한 사상과 이론을 놓치게 만든다. 동양평화는 우리나라의 독립과 함께 안 의사 철학의 굵은 뼈대다. 당시 많은 학자들이 동양평화론을 주장했지만 안 의사의 것은 자신만의 재해석과 보완을 통해 범국가적이며 나아가 새로운 평화이론으로 발전됐다. 안 의사가 단지 ‘원흉을 처단한 인물’이 아닌 위대한 사상가로 기억돼야 하는 이유다. 지난 10월 수원 보훈교육연구원에서 있었던 강의 내용을 정리한다.

지난 2010년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과반수가 경술국치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완전히 상실되고 식민통치를 받아야만 했던 어두운 역사가 점점 잊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는 현실이다.

근본적 원인은 역시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일제 잔재가 잘 청산됐는지를 묻는 질문에 97.3%가 아니라고 대답할 만큼 식민 시절의 아픔을 털어버릴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전 세계 피압박 해방운동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다. 독립 운동가를 선생, 의사, 열사 등으로 호칭하는 것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방법이 매우 다양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토록 열정적이었던 우리나라 의열 투쟁에는 세계의 독립투쟁과 다른 특징이 있었다.

바로 불특정 다수를 향한 무차별 총격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시락 폭탄을 던질 때도, 총독부 간부에게 총구를 겨눌 때도 그 행위가 역사적으로 명분이 있는지 정당한 일인지를 고민하고 숙고해 살인을 위한 살인이 되지 않도록 고민을 거듭했다.

1919년 조직된 의열단에서 신채호 선생이 만든 ‘조선혁명선언’ 강령을 보면 당연히 파괴해야 할 5개 일제 침략기구인 5당파와 반드시 척살해야 할 7부류를 설명한 7가살이 명확히 적시돼 있다. 따라서 모든 독립 운동가들의 행동은 명분과 대의가 있었고 목표가 분명했다는 점에서 테러와는 확실하게 구별된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던 안 의사는 이런 점에서 의사의 투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형 집행 전까지 집필했던 ‘안응칠 역사’에서 안 의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면서 “이 자가 이토가 맞는가, 이토가 아닐 때를 대비해 근처 근위병 몇을 저격했지만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까지도 내가 부적절한 살인을 하는 것은 아닌지, 나의 행위가 정당한지에 대해 생각하느라 러시아 경관이 달려올 때까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안 의사, 사상가이자 실천가

일제는 당시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사형 선고와 집행을 이례적으로 빨리 진행시켰다. 안 의사가 재판과정 중 열거한 ‘이등박문의 15대 죄악’이라는 편지에 ‘이토는 태황제를 죽인 폐륜아’라고 명시해 일본 재판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의사’라고 하면 ‘단지, 이토 히로부미, 하얼빈, 뤼순 감옥’ 등 단편적인 사실만을 떠올리지만 안 의사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동양평화론’에 있다. 당시 한·중·일 지성인들은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동양평화론을 주장했으나 안 의사의 것만큼 압도적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사형 선고 후 “동양평화론의 집필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면 항소를 포기하겠다”라는 조건을 걸고 집필에 몰두했던 안 의사는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일제에 의해 동양평화론을 미완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안 의사가 사살한 이토 역시 동양평화론을 주장했으나 그 구상은 완전히 다르다. 이토는 일본을 맹주로 하는 파괴적이고 침략적 연대론을 주장한 반면, 안 의사는 대등하고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상태에서 3국이 연대하고 제휴하자는 논리를 담고 있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가 진정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해야 될 것은 조선의 독립이고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3국 연대론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안 의사는 1909년 동아시아 구상론을 통해 3국이 같은 경제단위를 형성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동일한 화폐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 유럽국가들이 유럽연합을 형성하고 있는 것보다 100년 앞선 구상이다.

또한 3국이 각각 단일 군대를 보유하면 연대론이 깨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공동의 군대를 조직해야 하고, 단일 법률 체계를 만들어 법 집행에 차등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것은 결국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침략할 수 없도록 2중, 3중의 제도적 장치를 갖추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전제는 조국의 독립이다. 그것은 안 의사 사상의 한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동아시아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평화구도'와 공동체의 모델로 인식되는, 대단히 선구적인 제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 국민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가장 존경하는 독립 운동가 안중근. 안 의사의 공적은 이토 이로부미를 처단한 것만이 아니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으로 높은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고, 이토의 사살은 그 가치 실현을 위한 암초 제거였을 뿐이다. 그것이 동양평화론을 제치고 안 의사를 대표해서는 안 된다.

안 의사는 100년 이상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이면서, 동시에 계몽운동부터 의병 항쟁, 요인 암살 의거 투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권 회복의 방법들을 실행해 온 탁월한 실천가였다.

그의 나라사랑 정신과 실천에서 우리 민족의 미래를 향한 혜안이 보이고, 오늘을 사는 후손들의 과제가 보인다.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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