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든 그 사회를 이끄는 그룹을 우리는 사회지도층이라 부른다.

사회지도층은 선거로 뽑는 국회의원·시장·시의회의장·교육감 외에 전문 직종에 근무하는 분들도 이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사회지도층이며, 아울러 유명 기업인도 빼놓을 수 없는 사회지도층이다. 즉 사회지도층이라 함은 사회적으로 덕망 있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약한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 수 있는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사회지도층 모두를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최근 보도들을 보면 이들의 소외계층에 대한 편견과 사회양극화로 인한 차별이 점점 심화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때 묻지 않은 샐러리맨들이 자신들의 훈훈한 주머니로 소외계층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지만 사회지도층의 속주머니는 아직도 열릴 줄을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전 동아일보 대기자인 정 모 기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가난하다는 말은 배고픔과 헐벗음과 풍찬노숙(風餐露宿)이 어우러져야 본뜻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가난은 몸소 겪어봐야 그 무서움과 서러움을 알 수 있는 것이지 백번 들어봐도 모른다”

필자는 6·25전쟁 발발 후 1·4후퇴 시 어린 나이에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며 경북 김천으로 피난을 갔다 온 경험이 있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인지라 부끄러움은 잊은 채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밥을 얻어먹던 피난생활이 생각난다.

전쟁이 한창인 그 시절 모두가 굶주렸던 때, 자신의 몫까지도 서로 나눌 줄 알았던 인심 좋은 김천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가끔 김천을 지날 때면 달리던 차를 잠시 멈추고 그 옛날을 회상해 보며 가난한 이웃을 위한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한다.

오스카 루이스는 ‘가난 그 자체와는 다른, 가난의 문화’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가난의 문화라 함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생활의 방법이다. 그는 이를 일러 기층문화라 했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만나면 이미 가난하다는 의미마저 사라진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는 걸레 같이 헤진 베옷을 걸치고 다녔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증자(曾子)도 비록 굶었으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사회지도층이나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은 가난한 자나 소외계층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기업인의 비리가 터질 때 몇 천억, 정치인의 비리가 터졌다면 몇 백억 원 수준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박탈감을 느낄까.

새로 시행되는 김영란 법으로 세상이 조금 더 투명해지리라 기대해 본다. 특히 국회의원들도 특혜를 내려놓겠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모으고 있는 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그들이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내려놓음으로서 국민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으면 한다.

가난이 결코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난의 긴 터널을 지내봐야만 삶의 기쁨도 알고 삶이 무엇인지 보인다고 한다.

가난한 이웃을 도울 줄 아는 미학(美學), 오늘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닌가.

오용균 공군예비역중령. 현재 (사)모두사랑장애인야간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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