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의료진의 의료활동 모습.

전쟁이 일어나면 어김없이 발생하는 것이 전쟁포로와 전사상자(戰死傷者)다. 6·25전쟁도 예외는 아니었다. 3년 1개월 동안,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르며 막대한 부상자가 속출했다. 국군과 유엔참전군의 부상자만 해도 무려 55만 5,022명에 달했다. 지금 대한민국 국군병력과 맞먹는 엄청난 숫자다. 그 가운데 국군 부상자가 45만 742명으로 가장 많았다. 조국을 위해 목숨 내걸고 싸웠다는 증거다. 그 다음이 9만 2,134명의 부상자를 낸 미국이다. ‘혈맹’이 거저 얻어진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나게 해준다. 이들이 흘린 피가 대한민국을 살려냈다.

유엔참전국 군대의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유럽과 아시아에서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의무병으로 구성된 의료지원부대를 한국전선에 파견했다. 때로는 구급차로, 때로는 헬기로, 때로는 병원선으로, 때로는 들것에 실어 ‘생명구하기’에 누구보다 힘썼다. 스웨덴·인도·덴마크·노르웨이·이탈리아가 의료지원부대를 보냈다.

 

스웨덴의 적십자병원

스웨덴은 1950년 9월 28일, 최초로 한국에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했다. 스웨덴은 의사 10명, 간호원 30명, 기타 기술행정요원을 포함한 160명으로 구성된 적십자병원을 파견해 의료지원활동을 전개했다. 적십자병원은 미 제8군사령부의 통제 하에 부산에서 진료업무를 수행했다. 파견 초기에는 200병상이던 것이 점차 확장해 나중에는 450병상으로 늘어났다. 이 병원은 전쟁 기간 중 부상군인의 치료를 담당하다가 전선이 소강상태에 이르면 한국 민간인 환자에 대한 진료를 병행했다.

또한 그들은 한국 의료진에게 그들의 선진화된 의료기술을 전수했다. 강원 인제 서화지구 전투에서 적의 수류탄에 의해 복부관통상을 입고 내장이 파열된 박정인(육사6기, 3사단장 역임) 대대장도 사경을 헤매다 스웨덴 의료진에 의해 살아났다. 그만큼 그들의 의료기술은 뛰어났다. 스웨덴 적십자병원은 휴전 후에도 계속 임무를 수행하다가 1957년 4월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인도의 제60야전병원

인도는 1950년 11월 20일에 의사 14명, 행정관 1명, 보급관 1명, 위생병 329명으로 구성된 제60야전병원을 한국에 파견했다. 제60야전병원은 인도 공수사단 편제상의 부대로서 공수훈련을 받음으로써 공수작전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부산에 도착한 제60야전병원은 2개 제대로 나뉘어, 본대는 영연방 제27여단에 배속돼 영국군에 대한 의료지원을 직접 실시했고, 분견대는 대구에 주둔하면서 한국 육군병원과 민간인에 대한 진료를 실시했다.

제60야전병원은 1951년 7월 28일에 영연방 제1사단이 창설되자, 여기에 배속돼 사단 야전병원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 인도의료지원부대는 ‘야전병원’ 명칭에 걸맞게 전투부대와 함께 이동하며 의료지원활동을 했다. 인도 야전병원은 평양을 비롯해 주로 최전선이 형성된 장호원, 여주, 가평, 의정부, 적성지역에서 의료지원활동을 했다.

특히 인도 야전병원의 1개 공수의무분대는 1951년 3월 23일 문산에서 실시된 미 제187공수연대전투단의 공수작전에 참가해 이 부대에 의무지원을 실시했다. 휴전 후 제60야전병원은 송환거부포로를 처리하기 위해 한국에 파견된 인도군의 포로송환관리단에 통합돼 이들을 지원하다가 1954년 이들과 함께 귀국했다.

 

덴마크의 유틀란디아호 적십자병원선

덴마크는 1951년 3월 7일에 의사, 간호원, 그리고 의료종사원으로 구성된 100명 규모의 적십자 병원선을 한국에 파견했다. 병원선의 이름은 유틀란디아(Jutlandia)호였다. 덴마크 병원선은 최초에는 부산항에 위치하면서 수시로 전방으로 이동하여 환자를 진료했으나, 1952년 가을부터는 주로 인천항에서 의료지원을 실시했다. 부산항에 입항한 후 2회에 걸쳐 승무원의 교대와 의약품의 수령을 위해 본국까지 왕래했다. 덴마크 병원선이 승무원의 교대를 위해 본국으로 귀환할 때에는 벨기에·에티오피아·프랑스·그리스·네덜란드·터키·영국 등을 순회하면서 해당국의 전사상자와 송환포로를 후송하기도 했다.

특히 덴마크 병원선은 1951년 6월, 공산군측이 휴전협상을 제의했을 때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이 덴마크병원선을 휴전회담 장소로 제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탈린의 지시로 이를 거절하고, 개성을 회담장으로 원함에 따라 덴마크 병원선에서의 휴전회담은 무산됐다. 덴마크 병원선은 휴전 후인 1953년 8월 16일에 복귀했다.

 

노르웨이의 이동외과병원

노르웨이는 1951년 6월 22일에 의무 및 행정 요원 83명으로 구성된 60개 병상 규모의 이동외과병원을 한국에 파견했다. 그 후 병력이 추가로 보충돼 이 병원의 근무인원은 106명으로 증가됐다. 이동외과병원은 미 제8군사령부의 계획에 따라 미 제1군단 지역인 서울 북방의 제1군단 예하 각 사단에 대한 의무지원을 실시했다.

이 병원은 군인 부상자를 치료하고 여유가 있을 때는 한국 주민들도 진료했다. 그들은 1954년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국주민들을 성심껏 진료해 줬다. 그들의 박애정신에서 나온 따뜻한 의술은 한국 국민의 가슴 속에 고마움으로 깊이 자리 잡았다.

이동외과병원 진료진은 6개월 단위로 교대됨에도 불구하고 100여명이나 연장 근무를 지원하며 열악한 한국에서의 의료지원활동을 보람으로 여겼다.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의 연 근무인원은 623명이었다. 이 병원은 1954년 10월 18일에 귀국했다.

 

이탈리아의 제68적십자병원

이탈리아는 6·25전쟁 발발 당시 유엔회원국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1950년 8월, 국제적십자연맹이 한국에서의 부상자 치료 활동 등을 적극지원해 줄 것을 각국 적십자사에 호소하자 이에 호응해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했다.

이탈리아는 1951년 11월 16일, 제68적십자병원을 파견했다. 병원은 군의관 6명, 행정관 2명, 군목 1명, 약제사 1명, 간호원 6명, 위생병 50명 등 66명으로 구성됐다. 이탈리아 병원은 모두 150개의 병상을 갖추고 있었다. 이 병원은 서울 영등포에서 유엔군 장병에 대한 진료활동을 실시했다. 아울러 한국 민간인에 대한 진료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휴전 후에는 민간인 진료 및 구호업무를 실시했다. 이 병원은 1952년 8월에 근무교대가 있었으며 연 근무인원은 128명이었다. 이 병원은 1955년 1월 2일에 귀국했다.

이렇듯 한국에 의료지원부대를 파병한 5개국은 매일 넘쳐나는 부상자들을 치료해야 하는 엄청난 격무와 한국에서의 폭염과 혹한, 그리고 열악한 의료 환경에도 불구하고 밤잠을 설쳐가며 인술(仁術)을 펼쳐 꺼져가는 생명을 하나씩 살려냈다. 그런 점에서 누가 뭐라 해도 그들은 히포크라테스와 나이팅게일의 박애정신을 몸으로 실천한 ‘백의의 신사와 천사’들이었다. 그들의 각별한 노고와 숨은 헌신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자유로운 나라로 존재하게 됐다.

 

남정옥 문학박사,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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