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김일성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됐으나, 이후 유엔회원국이 대거 참전한 세계전쟁이었다. 또한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첫 번째로 일어난 국제 전쟁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에게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혔다. 제2차 대전 이전 규모나 피해로 보아 세계최대의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전쟁명칭을 ‘대전쟁(大戰爭, the Great War)’으로 불렀다. 인류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커다란 전쟁이라는 의미에서다.

그 후 그보다 더 큰 전쟁이 1939년 독일에 의해 시작됐다. 이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 훨씬 많은 물적·인적 피해를 입혔다. 역사가들은 앞서 일어난 대전쟁을 제1차 세계대전, 독일·일본·이탈리아가 일으킨 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부르게 됐다.

제2차 대전을 끝내면서 연합국 정치지도자들은 각오를 다졌다. 다시는 이 지구상에 전쟁이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유엔을 창설해 국제평화를 담당하게 했다.

그런데 북한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이 지구촌에 5년 만에 또 다시 전쟁이 터졌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가만있지 않았다. 일찍이 한 번도 써 본적이 없는 집단안전보장이라는 칼을 빼들었다. 그렇게 해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유엔이 나섰다.

그런데 한국을 돕겠다고 나선 국가들 대부분이 미국과 영연방 그리고 유럽 등 백인들 국가였다. 유엔의 이름으로 응징하게 될 유엔군에 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의 참여도 필요했다. 그래야 국제평화를 위해 칼을 빼든 유엔에 힘과 명분이 실리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도 적극 참여했다. 이때 아프리카에서 한국을 돕기 위해 참전한 국가가 바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에티오피아다. 검은 대륙의 용사들이 하늘과 지상에서 한국을 돕기 위해 파병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의 활약

▲ 남아공 공군 ‘나는 치타’ 대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한국전선에 공군을 파병했다. 남아공은 유엔안보리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 결의가 통과되자 1950년 7월 1일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군사지원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한국과의 지리적 여건을 고려할 때 전투부대 파병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판단해 이를 미국과 논의했으나 7월 말까지 그 해법을 찾지 못했다. 이에 남아공은 8월 4일, 의회의 동의를 얻어 전투비행대대의 파병을 결정하고 부대편성에 들어갔다.

남아공은 최초 새로운 대대를 창설해 파병할 방침을 정하고 지원자를 공모했으나 정규군은 물론이고 예비역과 민간인들까지 지원이 쇄도해 이를 포기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유럽·아프리카·중동지역에서 ‘나는 치타(Flying Cheetah)'라는 별칭을 얻고 용맹을 떨쳤던 제2전투비행대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남아공 파병이 급물살을 타고 순조롭게 진행됐다. 1950년 9월 5일, 유엔군사령부가 있는 일본 도쿄에 연락업무를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군연락본부’가 설치된데 이어 9월 26일에는 장교 49명을 포함한 대대 총병력 826명이 선박 편으로 남아공의 더반항을 출발해 40일간의 긴 항해 끝에 11월 5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들은 도쿄 외곽에 있는 미 공군의 존슨기지로 이동했다. 이는 남아공 역사상 최초의 극동지역에 대한 파병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후 남아공 전투비행대대는 11월 6일 미 공군으로부터 F-51전투기 16대와 장비를 인수했다. 비행대대는 최초 미 제6002전술지원비행단에 배속돼 현지적응훈련을 받은 후 중공군 개입으로 전선이 악화되자 11월 15일, 선발대가 한국의 수영비행장으로 이동해 작전활동에 들어갔다.

한국에서 비행대대는 미 제18폭격비행단에 배속돼 공중작전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비행대대는 평양비행장, 수원비행장, 진해기지, 여의도기지, 횡성기지, 오산기지 등 전후방 기지를 오가며 유엔군의 주요 공군 및 지상 작전에 참가했다. 그 과정에서 비행대대는 조종사 826명이 95대의 F-51전투기와 20대의 F-86제트전투기로 1만 2,405회의 놀라운 출격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공군조종사 36명이 전사하고 8명이 포로가 됐으며, F-51전투기 74대와 F-86제트전투기 4대를 잃었다. 대한민국 영공을 수호하다 산화한 고귀한 희생이 아닐 수 없다.

 

에티오피아 육군의 활약

▲ 정찰 떠나기 전 작전 지시를 받고 있는 에티오피아 가그뉴부대원들

에티오피아는 6·25전쟁 당시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한국에 지상군을 파병한 국가다. 에티오피아는 유엔안보리에서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 결의에 따라 유엔사무총장의 지원요청을 받게 되자 셀라시에 황제는 즉각 군사지원을 밝혔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의 침략을 받고 이를 국제연맹에 호소했으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침략을 받아야만 했던 쓰라린 역사를 갖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파병할 부대의 규모·장비·수송수단 등을 미국과 협의하고 1,200명 수준의 1개 보병대대를 참전시키기로 결정했다. 부대는 1년 주기로 교대하기로 했다. 1950년 8월부터 에티오피아는 부대편성에 들어갔다. 부대는 황제의 명에 따라 황실근위대에서 차출해 편성했다. 편성된 대대는 영국군에서 파견된 교관단의 지원 하에 수도 아디스아바바 근교의 한국지형과 유사한 지역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출정식에서 셀라시에 황제는 “국제평화와 인류의 자유 수호를 위해 침략자에 대항하고 용전하라!”는 환송치사와 함께 출정부대의 명칭을 ‘관통하기 어려운 물체 또는 상대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거나 궤멸’을 뜻하는 ‘가그뉴(Kagnew)’로 명명했다.

에티오피아 대대는 1951년 4월 16일, 가그뉴 대대와 지원사령부 요원 1,158명은 사령관 구에브레 대령의 지휘 아래 미 수송선을 타고 20일간의 항해 끝에 5월 6일 부산에 도착,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정부와 유엔군 수뇌부의 환영인사를 받고 동래의 유엔군수용소로 이동해 현지적응훈련을 받았다. 이후 에티오피아 대대는 7월 11일 미제7사단 제32연대에 배속돼 전투 활동에 들어갔다.

에티오피아 대대는 한국전선에서 평균 1,170명을 유지하며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산악전투를 수행했다. ‘아프리카의 스위스’라고 할 정도로 산악이 많은 곳에서 파병된 에티오피아 대대는 주로 험준한 산악지형이 많은 한국 중동부전선에서 전투를 치렀다. 에티오피아 대대는 철원-평강-금성-펀치볼-화천-김화-연천 등에서 고지전투를 수행했다. 특히 적근산 전투, 삼현지구전투, 851고지전투, 요크고지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으로 이승만 대통령 표창(2회)과 미국대통령 표창(1회)을 수상했다.

그 과정에서 대대는 3,518명이 참전해 전사 122명, 부상 536명의 큰 피해를 입었다. 에티오피아군의 희생이 컸던 것은 그들이 황제의 근위대라는 명예와 자긍심을 갖고 싸웠기 때문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단 한 명의 포로도 발생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군은 포로가 되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로가 되거나 실종이 될 상황이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명예로 생각했다. 그들이 그러한 명예심과 자부심을 갖고 한국의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한반도의 혹한을 견뎌내며 지켜낸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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