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가 진행하는 6·25전쟁 바로 알리기 교육은 지난 2010년부터 전국의 초·중·고등학교와 학군단, 교육대학 등을 대상으로 진행돼 왔다. 6·25전쟁 바로 알리기 교육은 예비역 장교와 6·25참전유공자, 나라사랑 전문 강사들이 나서 6·25의 진실을 알리고 전후세대에게 올바른 역사교육과 튼튼한 안보관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다음은 지난 7월 대전가양중학교에서 있었던 황인효 예비역 대령의 강의 내용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며 우리나라는 일본의 불법 점령에서 해방됐다. 당시 소련에게 한반도는 아시아의 공산주의 확장을 위해, 미국에게 한반도는 아시아의 공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해 매우 중요했다.

해방 후 며칠 뒤인 1945년 8월 24일 구소련이 한반도 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평양에 입성했고, 미국은 소련을 막고자 9월 9일 서울로 들어왔다. 이후 ‘조선’은 35년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아 정식 정부가 없다는 이유로 미국과 소련이 합의해 38도선을 정하고 남쪽은 미국, 북쪽은 소련의 신탁통치를 받게 됐다.

1948년 남측이 북측에 민주주의로 대표자를 뽑자고 제안했으나 북측이 이를 거절했다. 이에 선거가 가능한 곳에서만 먼저 투표를 실시하자는 유엔의 입장에 따라 남측이 먼저 투표로 이승만을 대표로 선출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으며, 이후 북측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따로 세우며 실질적 분단이 시작됐다.

1949년 3월 김일성과 박헌영 등 북한 핵심인사들이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 등 소련 지도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이때 소련은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는 것에 동의하고 긴밀한 협력을 약속했다. 김일성은 이어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과 만나 남침에 대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미국 주도 유엔군 조직의 결단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국군의 방어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집중하면서 기습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국군은 개전 하루 전인 24일 0시를 기해 비상경계령이 해제돼 병력의 1/3이 외출중인 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받았다.

개전과 함께 의정부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은 서울을 집중 공격했다. 국군은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고 한강선 방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한강다리를 따라 피난길에 나섰던 피난민 4,000여 명이 사망하고 국군도 맨몸으로 한강을 건넜다.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뺏겼고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북한군에 의해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왔다.

한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남침을 평화 파괴, 침략행위로 보고 북한군에게 38도선까지 철수를 요구했으나 북한은 이를 무시했다. 미국은 사회주의 진영을 봉쇄하기 위해 미국 주도의 유엔군을 조직했고, 낙동강 전선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이때 치러진 다부동 전투는 세계 전쟁사에 가장 처참한 전쟁으로 기록돼 있다.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55일간 15, 16세 학도병까지 동원된 전투로 국군 1만여 명이 낙동강 전선에서 희생됐다. 그 결과 당시 투입된 북한군 3개 사단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낙동강 전선을 되찾고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할 무렵, 유엔은 북한군의 허리를 절단해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워 첫 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9월 15일 한·미 해병대는 맥아더의 지휘아래 월미도에 상륙해 작전 개시 2시간 만에 점령을 끝냈다. 인천상륙작전을 전환점으로 전세를 반전시킨 유엔군은 패주하는 북한군을 추격, 개전 90일 만에 서울을 되찾고 10월에는 평양을 수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했다.

 

큰 희생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

그러나 압록강까지 쫓긴 북한군을 위해 중공군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에는 북한지역에서 철수하게 됐고, 청천강과 장진호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피난민들은 영하 27도의 추위 속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방어하며 함흥과 흥남으로 후퇴했고 맥아더가 미합참의 철수를 승인하면서 흥남철수작전이 개시됐다. 당시 피난민을 수송했던 메러디스 빅토리아 호는 가장 많은 사람을 구조한 선박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철수하고 수복하는 과정을 거쳐 전선은 현재의 휴전선 일대로 고착됐다. 이후 7월 유엔군사령부와 공산군사령부는 휴전을 위한 회담을 개시했으나 포로교환문제를 합의하지 못해 9개월 동안이나 회담이 중지되고, 2년이나 더 흐른 1953년 휴전협정을 조인했다.

3년에 걸친 6·25전쟁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피해를 냈다. 남한에서만 유엔군과 한국군을 포함해 병력손실이 18만 명이 넘었고 10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피해를 입었으며, 전쟁고아 1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이 생겼다.

6·25전쟁은 북한과 중국, 소련이 오랫동안 준비하고 모의해 만든 전쟁이었으나 우리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 국민이 힘을 모아 전쟁을 막아냈다. 이 과정에서 함께 자유를 지켜낸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63개국의 도움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후 전쟁의 참화를 딛고 선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원조를 받은 지 60여 년 만에 원조하는 나라, 원조공여국으로 발전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을 다시는 이 땅에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아직 ‘휴전 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우방국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각오를 새기고 역사적 진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

황인효 예비역 대령, 6·25참전유공자회 전문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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