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호수돈여학교와 성경여학교에서 공부한 이신애 선생은 1918년 루씨여학교 두산리 분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무렵 부흥회에서 손정도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선생은 1919년 5월부터 혈성부인회에 가담해 상해 임시정부로 보낼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같은 해 9월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해 부인단 총대에 선출됐다. 당시 대동단은 본부를 상해로 옮기기 위해 의친왕 이강을 중국으로 망명시키고자 했다.

대동단은 상해 임시정부의 특파원 이종욱 등과 연계해 제2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이었으나 11월 11일 상해로 향하던 일행이 만주 안동(오늘날 단동)에서 체포되면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일제 경찰의 체포망에서 벗어난 선생은 다시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 때 썼던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여성대표로 의친왕 이강을 비롯한 33인의 독립운동가와 서명했다.

11월 28일 오후 선생은 동료들과 함께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안국동 경찰관 주재소 앞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제경찰에 의해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선생은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 1920년 3월 1일 같은 동에 있던 유관순 등과 3·1운동 1주년기념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심한 고문을 당했다. 선생은 출감 후 광복이 되자 공주에서 한국부인회를 조직해 1947년부터 부녀계몽운동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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