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의 기습남침에 의해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회원국들 중 16개 국가가 전투부대를 파병해 대한민국을 도왔다. 우리나라는 그 중 유독 터키에 대해서만 ‘형제의 나라’라 부르며 각별히 예우하고 있다. 이는 우리 국민들이 2002년 한일월드컵 3, 4위전에서 대한민국과 터키가 맞붙었을 때 터키의 초대형 국기를 흔들며 열정적인 응원과 함께 3위를 터키에게 ‘양보’함으로써 경기장의 감동의 물결로 변했고, 그로인해 ‘형제의 나라’라는 이미지는 양국 국민들의 가슴속에 더욱 깊이 자리 잡게 됐다.

 

형제의 나라 유래와 터키의 파병

그렇다면 형제의 나라라는 명칭은 어떻게 유래됐을까? 여기에는 언어학적으로 우랄알타이어를 사용한다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6·25전쟁에 참전한 터키 참전용사들이 대한민국을 가리켜 ‘칸 카르데시’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 터키어로 ‘칸’은 ‘피’를 의미하고 ‘카르데시’는 ‘형제’를 뜻한다. 이를 합치면 ‘피로 맺어진 형제’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 연유로 터키는 대한민국 ‘피를 나눈 형제의 나라’로 여기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터키의 국내외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터키의 지정학적 조건은 공산국가 소련이 탐낼만한 것이었다. 터키는 예나 지금이나 소련이 중동 및 지중해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될 전략적 요충지다. 터키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었다. 소련이 흑해를 통해 지중해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터키의 다르다넬스해협과 보스포루스 해협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소련의 스탈린은 공산주의 팽창정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소련의 공산팽창정책의 관문역할을 하게 될 터키를 손아귀에 넣고자 노력했다. 이에 미국은 터키와 함께 그리스에 대한 소련의 팽창위협을 차단하기 위해 1947년 3월에 트루먼독트린을 선언하고 이들 국가를 군사적·경제적으로 지원했다. 이른바 미국의 대소(對蘇) 봉쇄정책의 시발점이다. 그렇게 해서 소련공산주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됐던 터키는 반공국가로 살아남게 됐다. 그것이 6·25전쟁 발발 불과 몇 년 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는 ‘극동의 그리스’인 대한민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자국의 어려운 안보상황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군대를 파병해 도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 공산주의 위협을 받고 있던 터키는 공산주의 위협과 침략이라는 동병상련 입장에 놓인 대한민국을 위해 기꺼이 ‘자유수호의 칼’을 빼들었다. 그것도 형식적인 파병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5,000여 명으로 편성된 보병 1개 여단을 파병해 마치 자신의 조국을 위해 싸우듯 투혼을 발휘하며 한국전선에서 용감히 싸웠다.

 

군우리 피해, 김량장전투서 설욕

북한이 기습남침하고 유엔안보리가 한국지원을 결의하자 터키정부는 1950년 7월 5,000여 명 규모의 파병을 제의했다. 이어 1950년 9월 10일 터키군은 한국에 파병될 보병·포병·공병·수송·병기·통신·의무부대로 구성된 제1여단(3개 대대로 편성)을 창설하고 초대 여단장에 야지시(Tashin Yazichi) 준장을 임명했다.

5,090명으로 편성된 터키여단은 9월 20일 지중해의 항구도시인 이스켄데룬에 집결한 후 9월 25일부터 1개 대대씩 한국전선을 향해 출발했다. 터키여단은 21일간의 항해 끝에 10월 17일 부산에 도착하여 대구에 위치한 유엔군수용소로 이동하여 현지적응훈련을 받았다. 항해 도중 터키여단은 미군연락장교단으로부터 미국무기의 사용법과 사격술, 전술 그리고 보전포(步戰砲) 협동작전을 교육받았다.

터키여단이 한국전선에 도착해 참전할 당시 전선 상황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파죽지세로 38도선을 돌파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후방지역에 남아 있던 북한군 패잔병들과 공비들을 소탕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터키여단은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대구-대전간의 주보급로 경비임무, 그리고 중공군 개입 후에는 군우리전투에 참가했다. 군우리전투에서 터키여단은 미 제2사단을 지원하러 갔다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터키군은 이때의 패배를 결코 잊지 않고 있었다. 1951년 초 유엔군의 재반격 작전 때, 터키여단은 드디어 용인의 김량장(金良場)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설욕전을 펼쳤다. 그들은 수적인 우위를 믿고 달려드는 중공군을 향해 총검을 꽂고 치열한 백병전 끝에 값진 승리를 구했다. 이로써 그들은 군우리전투의 아픈 상처를 씻고 ‘과거 대제국을 이룬 오스만투르크의 후예’로서의 명예를 되찾게 됐다. 김량장전투는 1951년 1월 터키와 중공군과의 치열한 혈전이었다. 중공군과의 백병전에서 터키군 1명은 중공군 40명을 상대로 싸워 이겼다. 이 전투에서 터키군은 총검과 개머리판만으로 471명의 중공군을 사살할 정도로 투혼을 발휘했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에서는 터키여단에게 각각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했다. 한 전투에 대해 양국에서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터키군이 어려운 전투에서 잘 싸웠음을 나타내는 증좌이다.

이후 터키여단은 수리산전투, 장승천전투, 모래성전투(1065고지), 사기막전투, 네바다전초천에서 그 용감성을 적군인 중공군에게는 물론이고, 아군인 유엔군에게도 충분히 각인시켜 줄 정도로 맹활약을 펼쳤다. 터키군은 6·25전쟁 동안 제1여단, 제2여단, 제3여단을 차례로 파병하여 한국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유엔군 지상작전을 지원하며 그 용감성을 발휘했다. 그 중에서도 포병관측장교였던 메흐멧 고넨츠 중위는 중공군의 포위를 받자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 택하겠다”며 자신이 있는 지역으로 포탄을 유도하여 장렬히 전사했을뿐만 아니라 그곳을 점령하려던 중공군의 진출을 저지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또한 강원도 양구 북쪽에 위치한 전초진지인 1065고지(모래성)전투에서 부여단장 파밀 대령이 적 포격에 전사했다. 1952년 6월 5일에 일어난 상황이다. 당시 양쪽의 전초진지의 거리는 불과 15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파밀 부여단장은 1065고지의 이러한 전투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하산하던 중 적 포격을 맞고 전사했다.

전쟁 기간 터키군은 2만 1,212명이 참전해 2,365명(전사 966명 포함)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참전 인원의 10%가 넘는 높은 사상자 비율이다. 이는 터키군이 그 어떤 군대보다 더 잘 싸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터키군은 전투에서 용맹했을뿐만 아니라 전쟁 중 발생한 고아들에 대해서도 온정을 베풀었다. 1952년 터키군이 수원에 주둔할 때 그들은 ‘앙카라 고아원’을 설치해 부모를 잃은 한국의 전쟁고아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고 교육을 시키는 휴머니즘을 보여줬다. 터키의 수도에서 따온 ‘앙카라 고아원’은 1966년까지 운영하며 많은 전쟁고아들을 보살폈다. 수원시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앙카라 고아원이 있던 자리를 공원으로 조성해 보존하고 있다. 터키와 한국을 연결하는 소중한 전쟁문화유산이다. 전쟁이 끝난 다음 우리 정부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던 용인에 터키참전기념비를 세워 그들의 희생을 기리며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이렇듯 터키는 북한이 기습남침하자 자국의 어려운 안보상황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한국에 군대를 파병해 힘껏 싸워 이겼다. 대제국 오스만투르크의 후예였던 터키는 마치 2년 전에 공산주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미국이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북한의 불법침략을 받은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기꺼이 군대를 파병했던 고마운 자유우방국이자 진정한 형제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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