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나는 아파트 단지 외곽과 접해있는 인도의 경계에 자연석으로 돌담을 쌓는 석공의 작업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수북이 쌓여있는 돌덩이 중에서 크기나 모양새를 살피는 등 탐색하는 움직임도 없이 마치 미리 돌덩이에 순번을 표시해 놓은 것처럼 그렇게 즉시즉시 돌을 옮겨와 돌담을 쌓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나는 돌을 선택하고 쌓는 석공의 지혜와 내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도 신기해서, 돌을 대충 선택해서 쌓는 것 같은데 어쩌면 저렇게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조화롭게 잘 맞을 수가 있는지, 무슨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는 건지 석공에게 물었다.

석공은 돌을 가져올 때는 다음다음 돌까지 미리 염두에 두고 가져온다고 했다. 그리고는 평생을 해온 일인데, 하고 말끝을 흐리며 돌담에 걸터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담배연기가 석공의 얼굴을 휘돌아 흩날려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석공의 얼굴을 훔쳐봤다.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힌 석공의 얼굴이 빛나보였다.

지혜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능력이다. 또 지혜는 우리가 삶의 일상에서 경험했던 온갖 시행착오, 과오 등을 여과시킨 산지식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실패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쉼 없이 스스로를 뒤돌아보게 하면서 자각시키는 반면교사와도 같은 삶의 교훈이기도하다.

그동안 우리는 과학, 이성, 논리가 절대적 가치로 지배하는 지식산업의 시대를 살아왔다. 경제의 중심적 생산자원을 오직 지식으로 인식하면서 생존을 위해, 더 윤택한 삶을 누리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그렇게 냉정하게 살아왔다. 지식을 오직 삶의 수단으로 동원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지 모른다.

또 지향하는 삶의 목표달성을 위해 우리는 이성과 논리에 구속되고 압박당하면서 수많은 선택과 포기를 해야 했고, 때로는 상실과 좌절과 아픔을 경험했던 인고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가 무엇보다도 소홀히 했던 것이 감성이다.

소홀히 했던 만큼 우리의 정서는 메마르고 거칠고 투박했을 것이며 카타르시스를 느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지식과 함께하는 지혜의 필요를 느낄 때가 되었다. 지혜에는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감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다음은 미래다. 미래는 목표이자 소망이다. 그래서 미래를 꿈꾸며 산다. 하지만 그 꿈의 좌표를 너무 높고 먼 곳에 두면 자칫 망상에 사로잡힐 수 있다. 행여 그것이 무모한 꿈이라면 차라리 포기하고 다른 선택을 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포기는 곧 새로운 기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발돋움을 하고,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고 조금만 달려가면 다다를 수 있는 그런 가까운 곳에서부터 미래를 찾는 지혜를 가졌으면 한다. 예비해 둔 다음다음 돌, 곧 자신이 목표로 하는 미래를 향해 묵묵히 돌담을 쌓으며 한걸음 한걸음씩 나아가는 석공의 지혜를 우리 모두 한번쯤 음미해봤으면 한다.

김영식(월남참전유공자, 참전용사의 애환을 담은 장편소설 ‘초조한 마중’이 있으며,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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