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군 병사들이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야전 침상에서 가족들로부터 온 편지를 읽고 있다.(1951년)

그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소 봉쇄정책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국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연합국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국의 영토 주변에 있는 국가들을 차례로 위성국가로 만들었다. 소련은 20세기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은 것은 완충지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에 소련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그들이 점령한 지역을 공산주의 위성국가로 만들어 갔다. 이른바 공산주의 팽창정책이었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로비아, 북한이 그 희생물이었다.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점차 그 범위를 넓혀 민주주의 발상지인 그리스에까지 침략의 마수를 뻗쳤다. 이를 주시하고 있던 미국은 좌시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진영의 맏형(Big Brother)임을 자처하며 국제평화를 위해 노력하던 미국으로서는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소련의 공산팽창정책이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판단했다.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국의 처칠 수상도 동유럽에서의 소련의 영향권 하에 들어간 공산위성국가를 두고 ‘철의 장막’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자유진영의 경계심을 촉구했다.

소련의 공산팽창정책에 근본적이면서도 단호한 대책이 시급했다. 이때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긴급처방책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1947년 3월 12일에 발표한 트루먼 독트린이다. 그 핵심은 소련의 팽창에 맞서 그리스와 터키를 지켜내기 위해 미국의 군사원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민주국가 그리스가 의지하며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밖에 없었다.

외침 많은 반도국 형편 이해

이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에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4억 달러 군사원조를 요청해 승인받았다. 미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마셜플랜을 통해 이들 국가를 포함해 서유럽국가들에 대한 경제 원조를 마련했다. 전후 피폐해진 서유럽국가를 경제적으로 튼튼하게 해 공산세력이 침투할 여지를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취지였다. 그런 다음 미국은 소련의 침략에 맞서 서유럽 국가들이 대부분 참여한 집단적 군사동맹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결성했다. 1949년 4월의 일이었다.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을 직접 받고 있는 그리스는 그런 연유로 트루먼 독트린과 북대서양조약기구인 나토(NATO)의 시발점이 됐다. 이는 곧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대표하는 미·소간의 본격적인 냉전으로 연결됐다. 그 중심에 고대 민주주의의 성지인 그리스가 있었다.

6·25전쟁 때 그리스는 육군과 공군을 파병해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원했다. 당시 그리스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의 원조, 그리고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의 후임으로 미 제8군사령관을 역임했던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의 도움으로 공산반군을 토벌한 후,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밴플리트 장군은 마셜(George C. Marshall) 미 국무장관의 추천으로 그리스 군사고문단장으로 부임해 그리스의 공산반군을 치밀한 계획과 훈련을 통해 완전히 소탕함으로써 자칫 공산정권이 들어설뻔한 그리스를 민주주의 국가로 살려내는데 크게 기여했던 장군이다. 마셜 국무장관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던 전쟁영웅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 연대장으로 참전했던 밴플리트 대령을 초고속으로 승진시켜 불과 8개월 만에 군단장으로 진출시켰던 배포가 큰 장군이었다.

그리스는 그런 상황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에 군대를 파병하게 됐다. 그리스와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위협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리스와 비슷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한민국을 ‘극동의 그리스’라고 불렀다. 트루먼 대통령은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의 침략이 마치 제2차 세계대전 후 그리스에 대한 공산세력의 침략과 같은 상황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리스는 지리적으로 볼 때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중국대륙과 태평양전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중요성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 이런 전략적 위치 때문에 수없이 많은 외침 속에 민족적 수난과 시련을 겪었던 반도국가였다.

소련은 그리스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공산반군을 지원했으나 미국의 군사원조와 신속한 군사고문단 파견으로 차단됐다. 이때 미 군사고문단장으로 부임하여 그리스 공산반군을 물리쳤던 장군이 바로 한국전에서 용맹을 날렸던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리스는 그 어느 국가보다도 탄탄한 반공국가로 거듭나 있었다.

특히 그리스는 유엔창설 회원국으로 국제평화와 안전보장 유지에 노력했고, 1949년 8월에는 대한민국을 정식 승인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북한의 남침에 따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의 남침을 무력으로 응징하고 대한민국을 지원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자 그리스는 한국에 군대 파병을 제의했다.

그리스는 1950년 7월 20일, 공군과 1개 보병여단 그리고 이를 지휘할 그리스군 사령부를 그해 11월 중순까지 파견하겠다고 제의했다. 이에 미 합동참모본부(JCS)에서는 공군 파견은 그리스 공군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며 거부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내전을 지도했던 밴플리트 장군의 건의에 따라 그리스는 공군과 육군부대를 파병하게 됐다.

참전병력 15% 손실 입어

그리스가 한국전선에 참전할 무렵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을 돌파하고 국경지역인 압록강을 향해 진출하고 있을 때였다. 이에 미 합참은 그리스의 파병규모를 대대규모로 축소하도록 그리스주재 미국대사에게 통보했다. 대신 그리스는 공산반군과의 내전에서 전투경험이 풍부한 장병들을 선발하여 편성했다. 그러나 파병을 함에 있어서 그리스는 육군 보다 먼저 공군을 파병했다. 1950년 10월 13일 그리스 정부는 공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제13수송편대(C-47수송기 6대, 병력 67명)를 창설했다. 그리스 공군은 11월 1일, 그리스를 출발해 한반도의 공군작전을 총지휘하는 미 제5군에 배속됐다.

그리스 육군도 1950년 11월 10일, 국왕으로부터 부대기를 하사받은 후 11월 16일 미국 수송선을 타고 23일간의 항해 끝에 12월 9일 부산에 도착했다. 이후 김해에 위치한 유엔군수용소에서 현지적응훈련을 마친 후 12월 중순부터 전투 활동에 들어갔다.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된 그리스 대대는 이천(381고지), 철원(313고지), 연천(노리고지전투), 김화지역(북정령전투)에서 전투를 치렀고 그리스 공군은 장진호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 수송작전, 흥남철수작전, 백령도 지원작전 등을 통해 유엔공군 작전을 지원했다. 그리스 군은 전쟁기간 동안 4,992명이 참전해 전사 192명, 부상 543명을 포함해 모두 738명의 피해를 입었다. 참전병력의 약 15%에 달하는 인적손실이다.

이렇듯 트루먼 독트린의 수혜국이자 나토의 대표적 반공국가였던 아테네의 후예 그리스는 북한이 기습남침하자 자국의 상황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대한민국에 군대를 파병하여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리스는 마치 2년 전에 공산주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 미국이 자국을 지원하며 기꺼이 도왔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대한민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많은 희생을 내며 군대를 파병했던 우리의 소중한 자유우방국이었다.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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