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평리 전투 당시 미23연대에 배속됐던 프랑스 대대의 모습.

프랑스는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에 해군과 육군을 파병했다. 프랑스는 먼저 해군 파병을 결정했다. 1950년 7월 22일 프랑스 해군군함 그랑디에르(La Grandiers) 함을 한국해역에 파견했다. 한국해역에서 그랑디에르 함은 138밀리 대포 4문을 장착하고, 1950년 8월에 단행된 미 제1기병사단의 포항상륙작전과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이후에도 유엔해군의 해상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프랑스 육군파병은 해군보다 한 달 후인 8월 25일 결정됐다. 그 당시 프랑스는 육군파병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전후복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문제, 인도차이나 전쟁 등 국내외 상황으로 육군을 파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인도차이나에서의 평화유지 및 전투수행에 병력 8만 6,000명이 소요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국방예산의 4분의 1이 필요했다.

그런 까닭으로 프랑스 정부는 1950년 7월 22일 지상군 파병을 결정하고도 10여명의 고급장교시찰단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정부가 프랑스의 이런 처사를 달갑게 여기지 않자 프랑스는 결국 상징적 파병이 아닌 국제사회에서 국력에 걸맞는 실질적인 파병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파병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인물이 육군참모총장 블랑(Henri Blanc) 장군과 제2차세계대전시 나르빅 전투의 영웅이자 당시 알제리 외인부대 감독관으로 있던 마그렝 베르네(Magrin Verneney, 후에 몽클라르로 개명) 장군이었다.

그럼에도 육군파병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따랐다. 블랑 육군총장은 “현역 및 예비역에서 지원병을 받아 미국 보병대대 형태로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르죈느(Max Lejeune) 육군차관은 “단시일 내에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부대를 창설해야 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하다며 난색을 표했다. 블랑 총장은 “지원병을 선발할 때 제2차 세계대전이나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던 용사들을 엄격히 선발하여 뽑는다면 수 주일 내에 부대를 창설할 수 있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때 몽클라르도 르죈느 육군차관에게 “부대가 창설되면 자신이 부대장직을 맡겠다”고 압박했다. 그렇게 되자 파병결정권을 쥐고 있던 르죈느 차관도 육군파병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르죈느 육군차관은 블랑 육군총장과 몽클라르 장군의 결의를 듣고 난후 모흐(Juler Moch) 국방장관에게 육군파병 문제를 보고했다. 모흐 국방장관은 이를 승인하고 의회에서 파병이 통과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프랑스는 1950년 8월 25일 대한민국을 돕게 될 ‘유엔군 프랑스 대대’ 창설을 결정하게 됐다.

 

프랑스 대대 편성과 몽클라르 장군의 백의종군

프랑스 정부는 1950년 8월 25일 유엔군의 깃발아래에서 싸우게 될 프랑스군 대대의 창설을 공식 발표했다. 몽클라르 장군은 대대급 규모의 부대를 지휘하기 위해 3성 장군의 계급장을 포기하고 5개의 깃털장식이 달린 프랑스 육군 중령 계급장을 달았다.

프랑스 파병부대는 1950년 9월 18일 ‘유엔군 산하 프랑스 지상군부대(Forces Terrestres Francaises de I.O.N.U)’로 정식 발족됐다. 그리고 10월 1일 르망(Le Mans) 교외의 ‘오부르 병영기지(au camp d'Auvours)’에서 유엔군 프랑스 대대의 편성에 들어갔고 몽클라르 장군이 부대의 지휘관으로 정식 취임했다.

몽클라르 장군은 프랑스 파병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 규모가 대대급이라는 것을 알고도 지휘관을 자청했을 정도로 군인정신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때 르죈느 육군차관은 그런 몽클라르 장군에게 “내가 알기로는 미국의 대대는 육군중령이 지휘관인데 장군인 당신이 어떻게 대대장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몽클라르는 “저는 육군 중령이라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는 곧 태어날 자식에게 제가 최초의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몽클라르 장군은 한국전선에 대대장으로 참전했다. 그는 유엔군 프랑스군의 초대 지휘관을 1년(1950.11.29~1951.11.30)간 역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7번이나 부상당할 정도로 용감했던 그는 각종 무공훈장을 두루 받은 전쟁영웅이다. 당시 계급이 육군 중장이었음에도 한국전선에 파견될 대대급 규모의 부대를 지휘하고자 장군직책을 스스로 포기하고 참전했을 정도로 군인정신이 뛰어났다.

몽클라르의 본명은 베르네였다. 그는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임관 후 수많은 전투에 참전해 전공을 세웠고, 1940년에는 중령으로 프랑스군이 독일군과 최초의 전투인 나르빅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군부와의 갈등으로 런던으로 건너간 그는 몽클라르(Ralph Monclar)로 개명했다. 그는 외인부대장으로 있으면서 이탈리아 해군대장을 포함해 1만 4,000명의 적군을 생포했고, 마사우아(Massaoua)항을 점령하여 에리트레(Erythree) 전투를 종결시켰다. 1963년 몽클라르 장군이 사망했을 때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이 직접 장례식을 주관할 정도로 그는 프랑스 국민이 존경하는 전쟁영웅이었다.

 

한국전선에서 프랑스군 활약상

유엔군 프랑스 대대가 마르세유 항에서 출발하여 1950년 11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해 12월 11일 미 제2사단 제23연대에 배속되어 본격적인 전투를 실시했다. 프랑스 대대가 실시한 전투는 저격능선, 화살머리고지전투, 티본(T-Bone)고지전투이다. 그중 대표적인 전투가 지평리 전투이다.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시작됐다. 중공군은 주로 야음을 틈타 피리와 나팔을 불면서 공격했다. 몽클라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도 중공군의 나팔소리에 수동식 사이렌을 울리며 대응했다. 적이 진내에 들어와 백병전이 불가피해지자 대대장 몽클라르 중령을 비롯한 프랑스군은 철모를 벗어 던지고 머리에 빨간 수건을 둘러매고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공격해오는 중공군을 위협하며 싸웠다. 그렇게 해서 중공군을 격퇴했다. 그 전공으로 한국정부로부터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프랑스 대대는 한국전선에서 뛰어난 전공으로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2회, 프랑스 국방장관 표창 4회, 미국 대통령 표창 2회를 수상했다. 전쟁 기간 중 프랑스 부대에는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방문한데 이어 1953년 2월에는 프랑스의 주앙 원수가 방문하고 격려했다.

프랑스 대대는 주로 한반도에서 가장 험난한 중동부전선이나 서부전선의 격전지에서 전투를 치렀다. 프랑스군은 어떠한 난관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높은 용기와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숭고한 희생자들을 내면서 언제나 수적으로 우세한 공산군을 섬멸했다. 그리고 대승을 거두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부여된 진지들을 사수했고 공격에 있어서는 난공불락이라 알려진 적의 진지들도 어김없이 함락시켰다. 프랑스군은 혹독한 추위와 폭염,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조그마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자를 감수하며 싸웠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연인원 3,421명이 참전하여 전사 262명과 부상 1,008명 등 1,289명의 인명손실을 입었다. 참전 인원 1/3의 손실이었다. 커다란 피해가 아닐 수 없다.

프랑스군은 ‘프랑스혁명의 이념적 가치’를 계승한 자유를 사랑하는 민주군대로서 그 명성을 드높이며,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던 고마운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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