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하나 되어 함께 사는 ‘대동세상’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하면 대규모 시위와 폭력적 진압, 도청 앞의 시신, 마지막 진압작전, 이런 것들을 먼저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당시의 광주는 달랐습니다. 계엄령을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되살려야 한다는 시민들의 의지가 시위로 나타났고, 계엄군이 물러난 다음에는 함께 수습을 논의하면서 주먹밥을 나누고 격려하면서 이뤄낸 광주는 대동세상이었습니다.”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조선대 3학년이었던 김용철 씨(62)는 40년 전을 떠올리며 ‘민주’와 ‘대동세상’ 두 단
해마다 5월이면 광주 옛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에는 조금 특별한 햇살이 비친다. 광주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진입로에는 하얀색의 이팝나무가 함박눈처럼 꽃으로 피어난다. 18일 기념일 당일이 되면 이팝나무 아래를 걷는, ‘오월광주’를 가슴에 안은 이들의 가슴에는 회한이 가득 찬다. 5·18민주화운동 40주년. 역사는 이 일을 ‘1980년 불법 집권을 획책하는 신군부세력을 거부하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광주시민의 위대한 항거’로 기록하고 있다. 열흘간의 기록, 그 가운데로 들어간다.유신의 붕괴, 신군부의 반란집권의 획책,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한 달 앞둔 광주, 코로나19로 시내가 다소 한산한 가운데, 여전히 차가운 겨울 기운마저 남아있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기억, 언제나 상기하고 가슴에 새겨야 할 이야기들.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의 이야기들은 곳곳의 사적지에서 세상의 상황과 상관없이 제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있었다. # 5·18민주광장도청 앞 광장, 분수대, 그리고 넓게 열리는 금남로. 광주의 오월은 도청 앞 분수대의 빼곡하게 모인 시민들과 민주주의 회복을 외치는 힘찬 구호로 상징된다. 40년
지난해 6월 환한 태양이 비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병제4묘역 앞 한 장면. 정복을 가지런히 차려입은 학생들이 경건한 자세로 호국영령을 향해 묵념을 드리고 있다. 아직 앳된 학생들이지만 자세를 갖추고 마음을 다해 참배하는 모습에서 엄숙함이 느껴졌다. 다소 조용한 현충원에 따뜻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이날 참배행사를 가진 이들은 대덕대 호국보훈동아리 ‘호우회’ 학생들이다. 대덕대 호우회는 해양기술부사관과 학생들이 참여하는 동아리로, 2015년부터 매년 대전 지역의 고등학생과 시민의 호국정신 함양을 위한 호국보훈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복지로서의 보훈 지난 호에 정리한대로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다. 큰 힘이 작은 힘에게 원치 않는 피해를 주는 현상이 폭력이라면, 이러한 폭력은 불공평과 부조화의 증거이다. 불공평과 부조화를 줄이거나 없애는 만큼 평화가 구체화된다는 뜻이다.이 때 불공평과 부조화를 경제적이고 제도적으로 줄여가는 행위는 복지의 실천이기도 하다. 복지는 경제적 공평의 구현이자, 넓게는 공평을 위한 제도까지 조화롭게 적용되는 과정이다. 경제적 불평등의 극복이 일차적 과제이지만, 복지는 물질적 지원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정신적 차별을 극복하고
나라사랑신문은 청산리·봉오동 전투 100주년과, 6·25전쟁 70주년, 그리고 4·19혁명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온라인신문 특별기획 연재를 시작합니다. 나라사랑신문과 국가보훈처 보훈교육연구원(원장 이찬수)이 공동 기획하는 이 특별 연재는 올해 하반기 시작될 우리 신문의 ‘오프라인신문 구독체제 개편 및 온라인신문 강화’에 따른 새로운 기획입니다.오는 오늘(4월 14일) 첫 연재가 시작될 특별기획은 독립·호국·민주 각 보훈분야의 정책방향 제시와 보훈문화 발전을 위한 전문가 기고로 이뤄지며, 나라사랑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식된 것이었다. 1945년 9월 미군이 남한에 진주했다. 그들은 군정을 세우고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이식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황국신민교육을 폐지하고, 민주주의를 교육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민주주의를 조선의 정치체제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정치인들을 비롯한 사회지도층들도 대부분 일제치하 일본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이들은 극히
당시는 내 나이 20세 세상에 두려울 것 별로 없던 시절, 1960년 동국대 2학년 재학 중이었다. 4월 19일 아침 석조전 2층에서 막 수업을 시작할 즈음 한 학생이 강의실 앞 문으로 들어와 어제 고려대 학생들이 3·15부정선거 항의 시위를 마치고 귀가 중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하고, 우리도 동참해야 한다고 외쳤다.우리는 모두 일제히 일어나 을지로를 지나 스크럼을 짜고 서울시청으로 향했다. 연도에 시민들이 나와 박수와 환호로 우리를 격려했다. 한껏 사기가 오른 채 시청광장에 도착하니 이미 수많은 학생들이 광장을 가득
4월이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꿈꾼다. 4월은 우리 모두에게 민주주의를 향한 희망이고 진통이었다. 온 산하에 진달래 피어오르는 시절, 시민들은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고 정의와 평화를 외쳤다. 그렇게 일으켜 세운 민주주의가 오늘 우리 삶의 중심이 되고 있다. 수구적 사고를 딛고 내일을 향하는 꿈, 민족의 화해와 번영을 향한 노력, 악성 바이러스와 싸우는 모든 성숙한 시민의 힘까지. 오늘 4·19혁명 60년을 맞는다. 엄혹했던 세월을 넘어선 우리 모두의 한 발짝, 한 걸음이 오늘의 우리 민주주의를 이뤘다. 다시 4·19혁명을 생각하며 힘
완연한 봄 기운 가득한 4월, 굳었던 땅을 뚫고 푸른 싹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노란 개나리와 하얀 벚꽃이 피어나며 자연의 생명력이 되살아나는 계절이기에 더욱 가슴에 사무치는 날이 있다. 봄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날, 학생과 시민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4·19혁명. 민주혁명 60주년을 맞는 오늘, 곳곳에 남겨진 민주주의 함성의 현장을 찾았다. #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구의 2·28, 대전의 3·8, 마산의 3·15에서 4·19까지 당시 희생된 선열과 부상자,
지난해 6월 한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흥미로운 펀딩 프로젝트가 올라왔다. 우리들의 영웅인 국가유공자에게 감사함을 전하자는 취지로, 모자 1개를 구입하면 국가유공자에게 모자 1개를 기부하는 방식의 ‘땡큐캡’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 국가유공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눈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두 청년 여상헌(27), 박진우(27) 씨가 주인공이다. 20대의 젊은 두 청년은 어떻게 국가유공자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시작은 2018년 여상헌 씨의 군 시절로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그다지 길지 않다. 1960년 4·19혁명부터 따지면 60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60년 동안 한국 민주주의는 그 어느 나라보다 역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4·19혁명 이후에도 부마 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항쟁을 거쳐 최근 ‘촛불’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민주주의를 진전시킨 커다란 사건들이 계속 이어졌다.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1960년 4·19혁명은 단연 첫손에 꼽히는 사건이다. 4·19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같은 해 3월 15일에 있었던 정부통령선거였다. 한국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고교생들의 함성이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만 같다. 세상을 울렸던 그들의 힘찬 발소리가 여기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도 하다. 1960년 4월혁명으로부터 60년의 세월. 그 세월은 우리 땅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로 열매를 맺고 있지만 또 다른 과제를 안고 있기도 하다. 오늘 4·19혁명을 향해 달려갔던 2·28, 3·8, 3·15의 현장에서 주역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대구 2·28, 옛 기념탑 자리의 추억2·28민주운동 60주년을 꼭 2주일 남긴 대구. 활발한 모습이, 대한민국의 민
2020년, 1960년 4·19혁명과 함께 민주주의 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민주운동과 3·8민주의거, 3·15의거가 각각 60주년을 맞는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의 기틀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독재정권의 질주를 막아낸 힘은 피끓는 학생으로부터 시작됐다. 대구와 대전, 마산을 돌아 서울로 올라선 학생들의 정권에 맞선 의로운 투쟁, 이 투쟁은 결국 4월혁명을 거쳐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고 시민 주권의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운다. 1960년 대한민국 민주운동의 현장을 2회에 걸쳐 싣는다. 2·28
할머니와 손녀로 보이는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고 작은 액자를 꾸미고 있다. 액자 위로 작은 장식이 올라갈 때마다 행복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은자 어르신(90세, 가명)과 염지희(18세) 학생의 인연은 지난해 여름 시작됐다. 두 사람은 ‘국가유공자 인생기록 프로젝트’를 통해 만났다. 대전지방보훈청과 대전보훈요양원, 대덕고등학교가 함께 하는 이 프로젝트는 6·25참전유공자, 보훈가족과 고등학생을 일대일로 연계해 1년간 매달 만나며 보훈가족의 삶의 기억을 학생들이 기록하고 이를 책으로 남기는 작업까지 진행된다.6·25참전유공자의
보훈사각지대 해소, 국가책임 확대로 국가유공자 삶 보살필 것국가보훈은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이다. 대한민국을 되찾고, 지키고, 바로 세운 국가유공자의 뜻을 기리고 예우하는 일, 그것은 반듯한 나라 대한민국의 희망이다. 박삼득 국가보훈처장은 취임 이래 6개월간 국가보훈처가 보훈을 통해 그 희망을 실천하고 앞당기는 기관이 되도록 힘써왔다. 국가보훈처를 정책부서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 국가유공자와 가장 밀접한 보훈심사 체계의 중심을 잡는 일에 특히 심혈을 기울여 왔다. 박 처장에게 6개월을 넘어서는 소회와 새해 보훈정책에 대해
얼어붙은 공기와 차가운 바람에 문을 꼭 걸어 잠그게 되는 겨울, 인천 미추홀구에 새 단장을 마친 인천보훈지청 1층의 한 공간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이곳은 2018년 처음 심리상담 서비스를 개시한 보훈가족 마음나눔터. 그곳에는 찬 공기도 밀어낼 밝은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로 보훈가족을 환영하는 김지은(40세) 상담사가 있었다.김지은 상담사는 보훈가족과 지청 직원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언제나 찾을 수 있는 공간임을 알리기 위해 마음나눔터의 문을 항상 열어둔다. 보훈가족과의 거리감을 좁히려는 노력의 하나다.그는 심리상담사
우대수(67세) 전몰군경유족회 인천지부장은 지난해 육군 본부가 진행 중인 ‘6·25전쟁 무공훈장 주인공 찾기’ 홍보 포스터를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아버지의 성함과 군번 등을 알렸고, 1954년 10월 25일자로 아버지가 은성화랑 무공훈장에 추서된 사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슴 속에 울컥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1953년,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날아든 비보 한 장에 무너지듯 슬픔에 빠진 가족들 사이로 아직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한 아이가 있었다.아버지가 전사한 사실을 모른 채 아이
부쩍 추워진 날씨에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되는 이 계절, 보훈가족의 삶에 온기를 전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만났다. 본인도 상이용사로 불편한 몸이지만 12년째 꾸준히 대구보훈병원에서 안내봉사를 하고 있는 김영복(72) 씨다. 노란색 봉사자 조끼가 잘 어울리는 그는 보는 사람의 마음도 덩달아 즐거워지는 환한 미소로 다가왔다.대구보훈병원의 자타공인 터줏대감인 김영복씨는 상이군경이자 국가유공자다. 20대 때 군복무 중에 오른쪽 다리를 잃었을 때는 꼼짝없이 죽는 줄로 알았다고 한다. 여러 차례의 수술과 위기를 이겨내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난 그는
웅장한 기암절벽을 자랑하는 경북 청송 주왕산 자락 아래 아담한 주택이 따뜻하다. 이 집 거실에는 서만춘(92세), 조위완(88세) 어르신과 경북북부보훈지청 조정연 복지사(46세)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다.조정연 복지사는 곁에서 어르신이 놓치는 말이 있으면 또박또박 다시 전달해 드리고 있다. 난청의 어르신을 대신해 대화를 이어가는가 하면 대화 중간 중간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 묻고, 어르신의 삶에 공감하며 손을 맞잡는 모습이 할머니를 대하는 손녀 같았다.두 분 어르신과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향한 행선지는 황종만(86세) 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