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광복을 위해 힘썼던 이대산 애국지사가 16일 밤 9시에 작고했다.강원도 이천 출신인 이대산 애국지사는 만주에서 독립군 연락원과 유격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일본군인에 포로가 돼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광복으로 출옥됐다.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이대산 애국지사의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제8호실이며, 19일 발인을 마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조지 새넌 맥큔 선생은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서 1873년 태어나 1905년 부인과 함께 내한했고, 1909년 평안북도 신성학교 교장으로 본격적으로 교육에 힘썼다.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신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구속되자 선생은 이들의 석방과 공정한 재판을 위해 적극 앞장섰다.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자 선생은 일제의 강경한 탄압 사실과 3·1만세운동의 의의를 알리는 편지를 미국 시카고에 있던 컨티넨트(The Continent) 잡지사로 보내 게재하게 했다.또한 3·1운동의 발판이 된 2·8독립선언서 번역문을
1928년 충북 진천군에서 태어난 김영국 육군 대위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종합학교 제9기생으로 입교해 군사교육과 훈련을 마치고 육군소위로 임관한 후 제2사단 32연대에 배속된다.제2사단은 1951년 6월부터 적근산에서부터 김화 동쪽에 이르는 산악지대에서 방어작전과 전방에 대한 수색작전을 펼쳤고, 적과의 치열한 공방 끝에 734고지를 확보한 후 32연대에 진지를 방어하도록 했다.김영국 중위가 지휘하는 7중대는 연대 수색중대와 함께 734고지 전진거점을 전담하며 적의 공세에 대비했고, 중공군 제80사단 239연대가 734고지를
정용기 선생은 경북 영천 출신으로, 부친인 정환직 선생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1906년 영천창의소를 설치하고 권세가를 지어 백성들 모두 함께 의병으로 나설 것을 호소했다.정용기 선생을 대장으로 1,000여 명의 의병이 모여 ‘산남의진’이 결성됐고, 진군하던 중 선생은 대구감옥에 수감돼 고초를 겪었다.이후 선생은 대구에서 김광제·서상돈 등이 일으킨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해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의 회장으로 영천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정용기 선생은 1907년 다시 의진을 결성해 청하(옛 포항 지역 일부)·영천·청송 등지로
박평길 육군 병장은 강원도 고성군 수동면 564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적의 토치카에 수류탄을 던져 적군 10여 명을 폭사시키고 적과 백병전을 벌이다 전사했다.1925년 제주읍 이도리에서 태어난 박 병장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참전을 결심하고 부인과 자녀를 남겨둔 채 육군에 입대했다.1950년 10월에는 보병 제11사단 13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에 편성돼 전북 지역의 북한군 패잔병 주력부대를 분쇄했고, 1951년 4월에는 동부전선으로 이동해 제9중대 2소대 분대장이 됐다.같은 해 6월 강원도 고성군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11세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의 종살이 되라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며 자퇴하고, 매곡 성주록이 개설한 서당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배웠다. 이후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고 1926년 야학당을 개설하고, 1927년 ‘농민독본’을 저술해 한글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8년에는 부흥원, 1929년에는 월진회를 설립해 농촌개혁을 실시했다.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1930년 중국으로 망명했고, 상하이에서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
전병익 해군 중사는 1929년 충북 음성에서 출생했다. 1947년 해군에 입대해 1950년 4월 우리나라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에 배치됐고, 전쟁 발발 직후 대한해협 해전에 3인치 포 장전수로 참전했다.1950년 6월 25일, 1,000톤급 북한군 무장수송선이 무장병력 600여 명을 싣고 부산 동북방향 30마일 해상에서 남하했고, 전병익 중사가 치열한 교전 끝에 다음날 북한 무장수송선을 격침해 대한해협 해전의 승리에 기여했다.그러나 전 중사는 교전 중 적선이 발사한 포탄에 장렬히 전사했다.대한해협 해전은 해상교통로 출입항의
박은식 선생은 서북협성학교와 오성학교 교장을 맡아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면서 민중계몽운동을 벌였다.선생은 1912년에는 상해에서 동제사를 결성해 한국 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 주력했으며 1915년 ‘한국통사’를 간행해 동포들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했다.또한 북경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혁명당의 결성에 참여했다.선생은 상해의 임시정부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의 통일을 추진해 통합 임시정부 발족에 기여했다. 이 시기에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 중심으로
김금성 공군 준장은 1950년 10월 공군 소위에 임관해 공군비행단 비행대에서 정찰을 비롯한 비행임무를 수행했다.그는 1951년 10월부터 강릉기지에서 F-51 전투기로 출격을 시작해 평양 근교 승호리 철교차단 작전, 송림제철소 폭격 작전, 351고지 탈환을 위한 근접항공 지원 작전 등 한국 공군이 출격한 거의 모든 주요 작전에 참가해 획기전인 공을 세웠다.김 준장은 전쟁 기간 중 전투비행대대장, 작전과장 등을 역임해 비행단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전투조종사로서 출격 195회를 기록했다.또한 작전 중 8번이나 그의 전투기가 적
안중근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그는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해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했고, 평양에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해 산업진흥운동에도 매진했다.그는 1907년 의병부대를 조직해 독립전쟁 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으며, 1908년 연추에서 동의회라는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1909년에는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조직해, 단지로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그는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처단
이성가 소장은 1922년 만주 출생으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임관해 1949년 10월 태백지구 전투사령관으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했다.북한군 제5사단이 양양과 강릉을 잇는 해안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국군 제8사단을 공격하자 당시 제8사단장이었던 그는 북한군과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이며 북한군을 막아냈다.이어 영천전투에서 이 소장은 북한군 제15사단을 역습해 뛰어난 작전지휘로 반격의 기반을 마련해 빼앗긴 영천을 탈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영천은 대구와 포항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로 북한군이 점령할 경우 낙동강 방어선
지청천 장군은 1888년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가 폐교되면서 일본사관학교에 유학해 군사학 등을 공부했다.이후 장군은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으로 취임해 독립군 간부와 병사를 양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그는 1921년 한인 무장세력이 세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의 참모부원으로 선출됐고, ‘대한독립단’으로 개편된 후 군사고문으로 활동했다.지청천 장군은 1925년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조직이자 교민 자치조직인 정의부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을 겸했고, 1928년 만주 유력조직인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등 3
공해동 하사는 1931년 경상북도 달성군 출생으로 육군에 입대해 수도사단의 기관총사수로 복무하면서 수도고지 전투에 참전했다. 1952년 9월 6일 중공군으로부터 수도고지를 빼앗긴 수도사단은 제26연대가 6차례 탈환전을 전개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제1연대가 임무를 교대해 9월 9일 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이후 제1연대는 수차례에 걸친 적의 공격을 물리치면서 고지를 끝까지 사수했는데, 이때 기관총 사격으로 적의 공격을 지연시킨 공해동 하사의 활약이 컸다.9월 13일 새벽 1시 15분, 적의 출현이 급히 알려지자 공 하사는 수도고지
김구 선생은 1904년 신지식인을 길러내는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고, 황해도에서 교육 구국운동에 힘을 쏟았다.또한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해 학무총감에 추대돼 각 군을 돌며 계몽운동을 펼쳤다. 1910년 선생은 신민회에 가입해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일제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다 1915년 가출옥됐다.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중국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가 “임정의 문지기를 하겠소”라고 요청했고 경무국장에 임명돼 일제가 보내는 첩자들을 가려내 처단하고, 정부요인들과 동포들의 안정을 지켜내는 일을
홍은혜 여사는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자인 고 손원일 제독의 부인이다. 홍 여사는 1917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이화여전(현 이화여대) 음악과를 졸업하고 손원일 제독과 결혼했다.1945년 손 제독이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을 창설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하면서 홍 여사도 대한민국 해군을 위한 봉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그는 우리나라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의 구매를 위해 해군장병 부인들과 삯바느질로 전투함 구매 자금을 모으는 데 앞장섰다.또한 그는 6·25전쟁 중에 부상당한 해군과 해병대 병사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정전
이동휘 선생은 1873년 한남 단천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선생은 보창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운동에 헌신했다. 이후 선생은 대중을 자각시켜 구국운동에 나서도록 하기 위해 교육문화활동을 전개했다.선생은 서북학회와 비밀결사 신민회의 지도자로서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1911년 안명근, 양기탁사건에 연루돼 일제총감부에 체포돼 인천 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보냈고, 이후 압록강을 건너 북간도로 탈출했다.선생은 북간도 한인자치기관인 간민회를 지도하면서 북간도 각지를 순회하며 신교육 보급을 통
김재호 일등병은 1926년 전라남도 광양군 출생으로 육군에 입대해 수도사단 제26연대 1대대 3중대 1소대 소총수로 복무하면서 수도고지 전투에 참전했다.1952년 7월 7일부터 10월 14일까지 이어진 수도고지 전투에서 그는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수도고지를 사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10월 6일, 중공군의 전차 4대가 수도고지에 포격을 가하고 6,000여 발의 포탄을 일대에 쏟아부으며 집중 공격을 가했다.김재호 일등병은 전차포 사격에 엄체호가 무너지면서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다른 전우들이 모두 전사한 가운데 홀로 정신을 차리고
한용운 선생은 1879년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서 태어났다.선생은 1913년 한국불교가 새로운 문명세계에 적응할 수 있는 개혁방안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책으로 평가받는 ‘조선불교유신론’을 발간했고, 불교 혁신운동의 주역이 됐다.1919년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3·1운동 계획에 선생은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불교계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권유했다.선생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사람으로 참여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했으며,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운동에 가담했다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돼
김문성 해병대 중위는 1930년 제주도 서귀포 출생으로 1951년 3월 해병대 소위로 임관해 해병 제1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장으로 중동부 전선 도솔산지구 전투에 참전했다.그 해 6월 해병대 제1연대는 도솔산에서 북한군 최정예 제12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도솔산은 중동부 전선의 핵심 요충지였으며, 북한군의 저항 또한 매우 거셌다.이 작전에서 김문성 소대장은 24개 목표 중 가장 험준한 지점에 투입됐다. 적은 난공불락의 지형적 이점을 이용해 자동화기로 집중 공격했고, 김 소대장은 총탄을 무릅쓰고 선두에서 소대를
김규식 선생(1881.1.29~1950.12. 10)과 김순애 선생(1889.5.12~19 76.5.17) 부부는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김규식 선생은 1906년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여러 강연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했으며 1913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 신규식과 함께 박달학원을 설립하고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독립운동에 힘썼다.선생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됐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 자격으로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독립 항고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 다수의 독립운동 홍보문서를 작성·배포해 한국인의 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