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갑오년 한해도 끝자락에 와 있다. 월력의 마지막 장이 애처롭게 보인다. 한해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일까. 첫눈이 오고 추위가 찾아온다는 소식에 온 몸이 움츠러지는 오늘이다.나이가 들면 겨울과 함께 인생의 고통도 더 심해지는 법이다. 어디서 오는지 뼈저린 고독이 더해진다고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까운 이웃과의 따뜻한 대화, 편안한 나눔이 삶의 명약이 된다.우리 인생이란 타인의 삶과 얽혀진 연결고리 속에 존재한다. 인간은 혼자 살수는 없다. 외로움 속에서 하루해를 보내고 아침에 뜨는 해와 함께 또 하루를 기약 없이 혼자
우리 6·25참전 전우들의 간절한 바람은 우리의 피땀이 스민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한·미 연합전력이 한반도 전쟁예방에 계속 그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이번에 정부가 논란의 와중에 있던 전시작전권(전작권)을 현행 체제로 계속 유지하도록 결정했다 하니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우리 전우 모두는 그동안 너무도 답답했던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우리 역사에서 국방에 관한 중요정책을 논의할 때 국가이익보다는 분파적 세력 확장에 치중하여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불행하게도 나쁜 방향으로 결정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그로 인해 모진 전란에 휩쓸
저는 어린 시절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 또래들은 학교에서 공부할 때 학교에 다니지 못하였습니다.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독학을 하였습니다. 빈곤을 겪으면서 세월이 흘러 청년기가 되어 병역의무를 지키기 위해 해병대에 지원 입대했습니다.고된 훈련을 받고 실무에 배치, 의장대에 차출되어 훈련을 받던 중 월남 청룡부대에 지원하여 전쟁터에 참전하여 매복 정찰 등 많은 전투를 하였습니다.특수전투임무가 끝나고 귀국해 고향에 돌아와서 결혼하고 생업에 열중하면서 처자식 먹여 살리고 자식들 교육시키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생업에 동분서
‘책을 읽는 것’을 독서라 하고 ‘그림을 읽는 것’을 독화(讀畵)라 한다. 그러나 요즘 독화라는 말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그림을 통해 무슨 뜻을 나타내려고 하는지, 화가의 생각을 헤아리면서 그림을 보는 것이 감상이자 독화일 것이다.사회적으로도 요즘은 우리 그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와 함께 전통문화를 계승해야 한다는 얘기도 많아지고 있다. 한 평생 문인화를 해온 나로서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첨단 정보기기들이 늘어난 지금의 사회는 진지한 예술작품을 감상하기 보다는 시각적인 자극에만 치중하고 최신의 정보를 중시하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얘기처럼 광복 60여 년을 가까이하는 우리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대한민국의 후진 탈피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동분서주 땀을 흘리고 달려온 우리는 이제 기적같은 경제 성장으로 선진국 대열에 서게 됐다.하지만 선량한 우리 민족을 강제로 혹사하고 재산을 강탈하고, 애국지사를 투옥 또는 학살했던 인간 이하의 만행을 자행한 일본은 아직도 그들의 2세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왜곡해 우리를 격분케 하고 있다.게다가 왜곡 교과서의 내용을 시정한다는 약속을 해놓고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너덧 가지만 너절히 수정하고 나갔으니 그
우리나라의 유력 정치인들이 ‘상징정치’의 무대로 애용하는 곳은 국립현충원이다.그러나 지금까지도 6·25전쟁에서 조국을 위해 몸 바쳤던 우리나라 각 대학교의 재학생과 졸업생 참전자들의 경우 그 숫자나 이름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상태다.많은 선진국 명문 대학의 경우는 어떨까.일반적으로 선진국일수록 그들의 조국을 지키는 전쟁을 기념하는데 열심이며, 대학 또한 이에 능동적으로 동참하고 있다.영국인들이 전사하면 마을 한복판 위령비는 물론이고 그가 다녔던 교회나 기업·병원·학교 등에도 어떤 형태로든 당사자의 이름을 새겨 놓는다.그 중 가장
선비는 ‘지난날 학식은 있으나 벼슬은 하지 않은 사람 또는 학덕을 갖춘 이를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이 말은 우리말로 ‘재주와 덕이 있는 사람’, 또는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라 이를 만하다.공자의 제자 자로가 스승에게 “어떻게 하면 선비라 할 수 있습니까” 물으니 “선하고 권면하고 화평한 모습을 가져야 선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내가 사는 고향은 우리나라 선비정신의 발원지이자 선비정신 계승의 중심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그 대표적인 상징이다.소수서원은 1542년 중종37년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서원을 건립하고,
백화점에서는 세일행사를 자주하는지 사흘이 멀다 하고 전단지가 날아든다. 50%세일은 보통이고 더러는 70~80%로 방매하는 경우도 있다.얼마 전의 일이었다. 유수한 백화점 행사 첫날, 아내는 나에게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답답하게 집에만 있지 말고 바람도 쐴 겸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그리하여 나는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그날은 마침 공휴일이어서인지 의외로 사람들이 많았다.의류코너에서였다. 아내는 대뜸 봄 스웨터를 두 벌씩이나 골랐다. 두 벌이라고 해도 한 벌 값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왜 이렇게 가격이 저렴하느냐고 묻
금년 여름엔 유난히 소낙기성 비가 자주 내렸다. 마른하늘에 번개가 치면 하늘은 금세 두 조각으로 갈라지고 폭음을 동반한 소나기가 전시체제의 비상경보처럼 내렸다.나의 편견인지는 몰라도 소나기가 꿈 많은 청소년들의 것이라면 지리한 장맛비는 허리 굽은 노인들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여우비는 깜직한 소녀들의 것이라면 안개비는 홀로된 여인의 한숨과도 같은 비가 아닐까.어떤 연유에서 나의 머릿속에 이렇게 정리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생각되는 데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나는 농촌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내리는 여러 가지 유형의 비를 보
이번 주에도 두 장의 복권을 샀다. 이번 주 뿐만이 아니다. 나의 지갑 속에는 몇 푼의 용돈과 함께 항시 복권이 한두 장 쯤은 들어 있다. 벌써 십 년도 넘었을 것이다. 매주 두 장을 매입한다고 할 때 로또의 경우 한 달이면 사 만원, 일 년이면 사십 팔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수치에 개의치 않는다. 복권이라는 것이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권 추첨일이 임박한 시간에 복권을 사서 지갑에 넣고 거리를 활보해 보라.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의 경우는 힘이 생긴다. 그러나 그와 반대인
조국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위로하는 호국보훈의 달이 왔다. 우리나라 주변 열강들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와 남북간의 체제와 사상의 대립으로 인해 가혹하게도 치러야 했던 동족상잔 6·25 전쟁이 발발했던 달이다.이 참혹한 전쟁은 남북한 및 참전 외국인까지 합쳐 530여 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고, 무려 1,000만 명을 이산가족으로 만들고 말았다. 백의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긴 이 골육상쟁의 전쟁은 역사의 뼈아픈 교훈을 주는 이 민족 최대의 비극이기만 하다.몇 해 전, 우리의
집 앞에 핀 벚꽃이 죄다 떨어졌다. 봄 내음을 느껴볼 겨를도 없이, 마치 여름이 뜨거운 총칼을 들고 잡으러 오기라도 하는 듯 봄이 도망치려한다. 나와 아내는 두꺼운 이불을 넣어두고 여름옷을 꺼내며 남들보다 조금 일찍 여름 맞을 채비를 했다. 올 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까…. 창고에서 선풍기를 꺼내는데 그 뒤로 시커먼 박스 하나가 ‘툭’ 떨어졌다. 45년 전 내 군 생활 추억이 담긴 박스였다. 방으로 가져와 몇 년 만에 박스를 열었다. 해병대의 상징 붉은 명찰과 빛바랜 사진들, 그리고 군번줄까지.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볕이 좋은 날이면 희석이 할아버지는 골목길 한쪽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계셨다. 할아버지가 앉아계시면 희석이는 곧장 할아버지가 앉아계신 곳까지 전력 질주를 하여 달려갔다. 희석이는 할아버지 품에 안겼고,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할아버지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희석이는 할아버지를 좋아하고 잘 따랐다. 희석이는 동네 친구들끼리 전쟁놀이를 할 때면 멋진 목각 총과 칼을 가지고 나왔다. 희석이의 장난감은 모두 할아버지 작품이었다. 할아버지는 작은 칼 하나로 뚝딱뚝딱 장난감을 만들었다. 희석이는 할아버지가 만
가칠봉은 6·25전쟁 당시 가칠봉지구 전투로 유명한 격전지입니다. 국군은 북한군과의 일진일퇴의 피비린내 나는 공방전과 수많은 희생 끝에 백두대간과 해안면 등 전술적 요충지를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휴전 후, 김일성이 가칠봉을 확보하지 못해 3일 동안 대성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중요한 곳입니다.저는 군생활 중 가칠봉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뭐 하러 사서 고생하느냐?” “나 대신 올라가줘서 고맙다” 등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칠봉으로 향했습니다. 역시 들었던 소문만큼 가칠봉에서의 생활은 녹록치
나는 충북 단양의 수양개 마을에서 사과농사를 지으면서 60만 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 한반도 사람들의 생활단면을 그린 벽화를 보기위해 그곳에 있는 선사유물전시관을 자주 찾았다. 전시관 출입구 벽에 그려진 벽화는 남한강 상류 강변에 살던 우리 조상들이 돌망치, 주먹도끼, 주먹칼 등 석기시대 연장으로 물고기와 조개 등을 잡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맨발에 아랫도리만 가린 맨 몸이고 팔과 다리 그리고 가슴과 어깨 등의 뼈에는 살이 별로 붙지 않은 앙상한 모습이다.물론 당시는 문명생활 이전이었기 때문에 입을 옷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나라가 지금 이토록 평화롭고 선진국 대열에 서게 된 것은 6·25와 월남전참전용사 등 국가유공자들이 몸 바쳐 지켜온 결과입니다.최근 국제 정세가 급격히 변화하는 가운데 일본의 독도 관련 망언이 계속되면서 다시한번 온 국민이 촉각을 세워 불철주야 안보에 관심을 쏟아야 할 때입니다.일본은 일제 강점기의 우리 국민이 겪은 아픈 상처들이 아물기도 전에, 엄연히 역사적으로 우리의 영토라는 증표가 수없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교육을 받은 일본 학생들이 먼 훗날 기성세대가 되면 독도는 당연
평소에는 잊고 싶고, 잊고 살다가도 현충일 무렵이면 새롭게 떠오르는 한 많은 과거에 소리 없이 통곡하는 유자녀들을 아시나요.꽃다운 나이에 6·25전쟁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태어난 유자녀들.아버지는 전사하고 어머니는 재혼하고,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오갈데 없어 어린 나이에 삼촌 밑에서 자라면서 사촌 동생들을 업어 키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소에게 여물을 먹이며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 한글조차 모르는 까막눈으로 살아왔습니다.대다수의 유자녀들은 하나같이 아버지 없는 ‘호로자식’이라는 오명 속에서 일일이 다 열거 할 수도 없을
사과나무는 보통 4월 말에서 5월 초 1주일 사이에 붉은 꽃술이 박힌 횐 꽃을 피운다. 그리고 열흘 안에 시들고 마는데 가을에 크고 맛있는 사과를 따려면 꽃이 시들어 떨어지기 전에 반드시 한 가지마다 크고 잘생긴 꽃 한두 송이를 남기고 모든 꽃송이를 잘라내야 한다. 그것을 꽃적과라고 하며 꽃이 지고 유과가 달린 다음에도 2,3차 적과가 이어진다. 한 송이 꽃이 진 다음에는 그 자리에 대개 유과가 여섯 개 씩 달리는데 그 중 가장 크고 모양이 반듯한 녀석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다섯 역시 잘려 나간다. 나는 양 날개를 편 가위를 들고
어느 덧 4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천안함 피격사건은 아직도 생생하다.암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3월의 차가운 초봄 바다. 4년전 백령도 해상에서 갑작스런 포격으로 침몰한 천안함 승조원 104명 중 46명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고,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극한의 환경에서도 아랑곳 않고 수색작업에 임했던 고 한주호 준위도 결국 그들의 곁으로 떠났다.우리는 천안함 피격사건이 그 동안 북한이 해왔던 수많은 도발 중 하나라는 기록으로만 남겨 두고, ‘설마’라는 안일한 생각만이 남아있는 안보불감증의 상태로 돌아와 있는 것은 아닐까. 매번
서울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중앙선 무궁화호 기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충북 단양, 새로운 생활의 출발이지만 마음은 대단히 우울했다. 그렇게 우울한 가슴을 안고 선사유적박물관 근처 수양개마을로 들어가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사과밭을 일구고 사과농사를 시작했다.지역의 마을 주민은 나를 포함해 아홉이었는데 그중 내가 사과 밭을 일굴 때 도와주었던 농민 한 분이 농번기인 한여름에 음주운전 삼진아웃에 걸려 지방법원의 재판정에 서는 일이 벌어졌다. 삼진아웃은 면허취소는 물론이고 구류 6개월 이상 또는 근로봉사형 선고를 받는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