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하 선생은 전남 해남 출신으로, 1926년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당시 일제는 학생들의 반일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식민지 교육을 실시했고 이에 대항해 학생들은 동맹휴학의 형태로 학생운동을 전개했다.윤 선생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동맹휴학이 일자 이에 적극 동참하는 한편 독서회 활동을 통해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탐구하고 민족해방의 방안을 모색했다.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윤 선생은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시위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독서회 중앙부와 광주고보 독서회 간부로도
레너드 라루 선장은 35세에 7,600톤 화물선의 선장이 됐고, 6·25전쟁 중 명령을 받아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흥남부두로 향했다.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했지만 중공군의 개입과 매서운 추위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흥남철수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12월 15일 시작된 흥남철수작전은 군인, 피란민, 군수물자를 선박을 통해 이남으로 철수하는 작전이었지만 군인들과 피란민들을 다 태우기에는 선박이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레너드 라루 선장은 단 한 명의 피란민이라도 더 승선시키기 위해 군수물자를 버리고 1만4,000여명의 피란
유도발 선생은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이 체결되자 일제의 지배에 놓인 세상에서 차마 살아갈 수 없다며 11월 11일부터 단식에 돌입했다.유도발 선생은 “종사가 망해 장차 남의 나라의 백성이 되겠으니 남은 해가 얼마 없는데 구차하게 살기를 도모하는 것은 욕된 일이 아닌가. 이후로는 다시 음식을 나에게 권하지 말라”는 유서와 함께 명정(銘旌)에 ‘대한처사’로 써줄 것을 부탁했다. 단식 17일째 되던 날 유도발 선생은 향탕으로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고 죽음을 맞이했다.그의 아들 유신영 선생은 항일 인사들과 교류하며 학
하와이에 주둔하던 미군 25사단 5연대 1대대 중대장이었던 로버트 리 티몬스 대위는 1950년 한국에 파병됐다.그는 중대장으로서 중대원 100여명과 함께 경남 함안군 서북산을 고수하다가 적의 습격을 받고 부상을 당해 후송되는 중에 북한군의 기관총 공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했다.그가 임한 서북산 전투는 6·25전쟁 중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 전선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미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은성무공훈장을 1951년 추서했다.한편 1995년 그의 아들 리처드 F 티몬스가 미 제8군사령관(중장)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박영희 선생은 부여 출신으로 1913년 휘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던 중 은사인 이세영을 따라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 군사 지식을 배웠으며, 졸업과 동시에 교관으로 임명돼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선생은 1920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학도단장 및 김좌진 장군의 부관으로서 청산리전투의 영웅들을 배출하는 한편 청산리전투에 참전했다. 북로군정서군은 사관연성소 출신으로 이루어진 만주 독립군 부대 가운데 가장 훈련이 잘된 정예부대였으며,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만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지역에서 일제와 벌인 전투에서
1924년 2월 15일에 태어난 박양규 순경은 전라남도 나주시 나주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나주지역 방어를 위한 위수대로 활동했다.1950년 9월 10일 나주시 교동 소재 나주중학교에서 적정 탐지차 매복 근무를 하던 중 혈혈단신으로 적과 교전하여, 적 7명을 사살하고 5명에게 중상을 입힌 후 장렬히 전사했다.1951년 고인의 충의를 기리기 위한 충혼비가 나주역사공원내에 건립됐다.나주경찰서는 매년 경찰의 날인 10월 21일 충혼비를 찾아 참배하고 고인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있다.
평안남도 영원에서 태어난 채원개 선생은 소학교 졸업 후 조선보병대에 입대해 4년간 복무하며 군사학을 배웠다.1919년 선생은 고향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다가 탈옥해 북만주로 가던 중 대한독립단 조맹선 총단장인을 만나 대한독립단 군사교관으로 활동했다.선생은 1921년 통의부 대표로 상해로 파견돼 국민대표 회의에 참석하고, 이후 상해에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했다. 이어 1923년에는 한국노병회 특별회원에 선임됐고, 낙양군관학교 기병과에 입학해 중국 군벌 내전에 참여해 실전 경험을 쌓았다.1925년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중장은 미국 버지니아주 루레이에서 태어나,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1915년에 졸업했다. 이듬 해 육군 보병장교로 임관 후, 제1·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했고, 종전 후에는 맥아더 총사령부의 인사참모부장 및 참모장을 역임했다.6·25전쟁에 참전한 그는 미 제10군단장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원산상륙작전에서 상륙군을 지휘해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까지 진격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악화되자 흥남에서 철수작전을 계획·지휘했다. 흥남철수작전은 병력 및 군수물자 수송이 주 계획이었으나, 알몬드 중장은 현봉학 등의 건의를 받
이석영 선생은 1855년 서울에서 태어나 1885년 과거에 급제해 승지로서 고종을 측근에서 보필했다.선생은 1910년 동생인 이회영(건국훈장 독립장), 이시영(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 6형제 일가족과 함께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는 등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해 서간도로 망명했다.1911년 선생의 재정지원으로 서간도에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가 설립됐고, 경학사를 통해 농업개발, 민족교육, 군사교육을 실시해 구국인재를 양성하고 무장항일 투쟁을 전개하고자 했으나 1911년부터 연이은 대흉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어려움 속에도 선생이 기
지리산함(PC-704함)은 6·25전쟁 직전 국민의 성금으로 도입한 최초의 전투함 4척 중 하나로 1950년 7월 배치된 직후부터 전선에 투입됐다.지리산함은 1950년 덕적도와 영흥도를 탈환해 인천상륙작전의 관문을 열었고, 1951년 황해도 월사리에서 피난민과 유격대원을 구조하는 등 수많은 작전에서 전공을 세웠다.지리산함은 1951년 원산해역에서 적의 기뢰부설 저지를 위해 야간경비작전을 강행하던 중 새벽 적의 기뢰에 접촉돼 함 침몰과 함께 승조원 57명 전원이 전사했다.지리산함 57용사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이태영·권순달 중령,
1885년 11월 21일 평양에서 태어난 강혜원 선생은 가족과 함께 1905년 하와이로 이주한 후, 1913년 어머니와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 대한부인회를 조직하면서 한인부인운동을 시작했다.1919년 신한부인회를 조직해 동포들의 자유정신 고취, 조국 후원, 대한인국민회 지원 등에 힘썼다.그리고 강 선생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부인회를 통합해 1919년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립했고 총단장 겸 총부 위원으로 활동했다.선생을 비롯해 대한여자애국단 단원들은 바느질과 자수로 어렵게 모은 돈으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활동을 지원했다. 1920년 대한여
란가라지(A.G.Rangaraj) 중령은 1950년 11월 20일부터 1953년 2월 27일까지 인도 제60공정야전병원 지휘관으로 최전방 부대를 뒤따르면서 전상자들을 치료했다.제60야전병원은 영국군과 함께 최전선에 투입됐다. 란가라지 중령은 직접 수술조를 편성하고 전장을 누비며 환자를 수술하는 등 의무병들을 진두지휘했다.1951년 주암리 북쪽에서 중공군과 호주군이 격전을 벌이는 동안 제60야전병원 위생병들은 최전방 고지까지 나가 중상자들을 들것으로 실어왔다. 이때 많은 중상자들이 후방병원으로 신속히 후송돼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그
192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장철부 중령은 1944년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 재학 중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 전선에 투입됐으나, 2번의 탈출 시도 끝에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했다.그는 자신의 일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치기로 결심하고 본명 김병원을 장철부로 개명했다. 이후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제1지대 제1구대 유격대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그는 군사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김구 선생의 추천으로 중국 황포군관학교 기병과를 졸업했다.이후 1948년 육사 5기로 임관한 그는 중대장, 전술학 교관 등을 지
1885년 평안도에서 출생한 임병극 선생은 1917년 북간도로 망명해 대한국민회 일원으로 북간도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대한국민회가 만든 항일무장활동 기관인 국민회군의 제2중대장으로 독립전쟁의 최일선에 섰다. 사진은 대한국민회군 주둔지였던 중국 옌지.당시 국민회군을 비롯해 북간도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항일무장활동을 펼치던 독립군단들은 효과적인 항일전을 위해 1920년 북간도 독립군 연합체인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했으며, 그 유격대는 수시로 국내진입전을 전개하며 일제 침략자들을 응징했다. 1920년 6월 임 선생은 북로독군부 피복과
유찬희 선생(1884.8.8~1930.2.13)은 1913년 북간도에서 간민회 등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1919년에는 조선독립기성총회와 충열대를 조직했고, 1920년에는 임시정부 자금 모집과 대한국민회 무장투쟁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1923년 유찬희 선생은 중국 돈화현에서 수전을 개발하고,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동성노농공사의 간사로 활동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톡,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유찬희 선생의 첫째 아들인 유기석 선생(1907. 1.12~1980.11.27)은 1930년 상해에서
6·25전쟁 중 활약한 철도 기관사·부기관사가 이달의 전쟁영웅에 선정됐다.1950년 7월 19일 충북 영동역에서 김재현 철도 기관사(1923.9.21~1950.7.19)와 현재영(1928. 3.29~2010.7.19), 황남호(1928.12.29~2006.1.27) 부기관사는 군수물자 후송 작전에 참여했다.이들은 미군 결사대 30여 명을 기차에 태우고 이미 북한군이 점령한 대전까지 가서 ‘윌리엄 딘 미군 소장과 우군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기관차가 대전-세천 구간을 지나던 중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미군 27명이 전사했고, 김재
오광선·정현숙 선생 부부는 항일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으며, 부부의 두 딸과 사위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에 힘쓴 독립유공자 가족이다.오광선 선생과 정현숙(이명 정정산) 선생은 1913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오광선 선생은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1914년 서울 종로에 있는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했으나 총독부의 탄압으로 학원이 문을 닫자 중국으로 건너갔다.오 선생은 중국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동흥학교 군사교관과 체육교사, 대한독립군단 중대장, 한국독립당 의용군 중대장,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교관으로 군관 양성활동에 매진했다.이어
1928년 광주에서 태어난 성관식 소령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적군과 아군 간 전선이 교착되어 고지쟁탈전과 진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에 그는 해병 제1연대 3대대 2소대장으로, 경기도 장단 일대에서 중공군과 대치하게 됐다.중공군이 대규모 인해전술로 성 소대장이 방어하고 있던 장단 사천강가의 제36전진 진지를 포위·공격해오자, 성 소대장은 연대 포병지원으로 적의 후속부대를 차단시키고 교통호까지 진입한 적과 격렬한 수류탄전과 육박전을 벌이며 진지를 사수했다.성 소대장은 적군의 포격으로 참호가 무너지면서
1889년 11월 18일 경기도 수원군 남수리에서 태어난 김세환 선생은 청소년 시기에 교회를 통해 선교활동과 함께 교육과 구국활동을 펼치는 인물들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고, 이 과정에서 영향을 받아 교육가와 독립운동가로서 꿈을 키워나갔다.이어 선생은 서울과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 신지식을 습득하고, 귀국 후에는 수원상업강습소(현 수원고등학교)와 삼일여학교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해 지역사회의 중추적 인물을 배출하고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는 데 앞장섰다.1919년 선생은 3·1운동에 참여한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서, ‘순회위원’이라는
193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난 이재국 소령은 1952년 조종간부 1기생으로 임관한 후, 같은 해 9월 강릉기지에 배속되어 북한 지역에 있는 적의 벙커와 유류저장소, 포진지, 보급품집적소 등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그는 10월 한 달 동안 거의 매일에 가까운 28일을전투 비행에 나섰으며, 첫 출격 이래 7개월의 작전참여기간동안 총 99회 출격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1953년에는 지상군과의 공지합동작전에 참가한 이 소령은 특히 고성일대 지상군전투지역에 대한 근접항공지원작전에 참가해 적을 무력화시키고 아군의 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