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일제의 우리말 탄압에도 꿋꿋하게 한글을 연구하고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데 크게 기여한 장지영(1887~1976), 김윤경(1894~1969), 권덕규(1891~1950) 선생이 선정됐다.장지영 선생은 1921년 12월 김윤경, 권덕규 선생 등과 휘문의숙에서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했다. ‘조선어연구회’는 한글연구와 표준어 확립, 사전 발간 사업을 했다. 이들은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으로 선출돼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공표하는데 일조하고, ‘조선어사전편찬회’ 표준어 사정위원으로 참여해 한글사전 편찬에도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경남 함안군 여항지구 전투에서 북한군과 치열하게 교전 중 전사한 허재창 경찰 경감이 선정됐다.함안군 여항지구 전투는 북한군이 마산과 부산으로 진출하기 위해 낙동강 서쪽의 해안지역을 사방으로 연결하는 교통요충지인 함안을 점령하려던 것을 미군과 국군, 경찰병력이 합세해 저지한 전투다. 이로써 부산을 향한 교두보를 내주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허 경감은 전북 경찰국 순창경찰서에서 경사로 근무하던 중 1950년 7월 함안군 여항지구에서 전북 경찰국 소속 약 4,000명으로 편성된 혼성 경찰 인원으로 미 제25사
1892년 의료선교사로 부임한 애비슨 선생은 제중원 원장을 맡았다. 선생은 1919년 3월 일본 고위 관리들에게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를 대변하고, 3·1운동의 실상과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또한 3·1운동 부상자들을 적극 보호하고 치료했다. 선생은 은퇴 후 1942년부터 미국에서 기독교인친한회에서 임시정부 승인과 독립운동 지원을 호소하는 활동을 했다.1901년 함경북도 성진에 선교지부와 진료소를 설치하고 선교활동을 시작한 그리어슨 선생은 1908년 국권회복운동을 하던 이동휘 선생을 후원했고, 1919년 성진 지역의 3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홍창원 육군 중위가 선정됐다.수도고지 전투는 국군 제2군단 예하의 수도사단이 1952년 7월 7일부터 10월 14일까지 중동부 전선인 강원도 금성군 원덕면과 임남면에 위치한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일대에서 중국군 제12군 예하 제31사단과 제35사단과 벌인 고지쟁탈전이다.홍창원 중위는 수도사단 제26연대 5중대 1소대장으로 참전해 수도고지 방어를 위해 소대원들을 독려하며 선두에서 중국군과 맞섰다. 통신과 퇴로가 두절되고 압도적인 적 규모에 이기지 못할 상황에 처하자 홍창원 중위는 자신과 부대의 희생을 각오하고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의 실행자와 언론사 책임자였던 이길용(1899~미상), 송진우(1890~1945), 여운형(1885~ 1947) 선생이 선정됐다.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가 1위, 남승룡 선수가 3위에 각각 입상했다. 조선중앙일보는 8월 13일자 신문에 손기정 선수의 우승 소식을 알리며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웠고, 동아일보 역시 같은 날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게재했다.동아일보에 근무하며 직접 일장기 말소를 실행한 이길용 선생을 비롯한 기자들과 이들을 보호하기
이달의 6·25전쟁 영웅에 은폐된 적의 전차 4대를 파괴하고 1대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고지를 무사히 탈환하는데 기여한 송효석 육군 일등상사가 선정됐다.1950년 8월 9일 제12연대 2대대와 3대대는 적에게 201고지와 369고지를 빼앗긴 제13연대 1대대를 증원하기 위해 출동했다. 수암산 쪽으로 진출한 제3대대는 369고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적의 전차를 파괴하지 않고는 369고지와 아군 진지를 확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제12연대장이 특공대를 3개조로 편성해 투입했으며 특공대의 활약으로 은폐된 적의 전차 4대를 파괴하고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호가장전투에서 치열하게 전투하다 순국한 손일봉(1912~1941), 최철호(1915~1941), 박철동(1915~1941), 이정순(1918~ 1941) 선생이 선정됐다.호가장전투는 1941년 12월 12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무장선전대 제2대 대원 19명이 숙영지인 호가장 마을을 포위 기습해온 일본군과 황협군 200명과 맞서 싸운 전투이다.호가장전투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화북 진출 후 치른 최초의 전투이자 가장 치열하게 싸운 혈전이었다. 적군과의 병력 대비가 엄청나게 차이나는 중에도 대원들은 장시간 고군분투했
이달의 6·25전쟁 영웅에 1951년 참전해 전상 장병들의 치료에 주력하고, 정전협정 체결 후에는 민간인 진료와 치료에 전념한 노르웨이 이동외과 병원(NORMASH : Norwegian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이 선정됐다. 노르웨이는 유엔의 요청에 따라 적십자를 통해 의료지원부대를 파견했다. 노르웨이 이동외과 병원이 한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연인원 623명이 파견돼 전상 장병들의 치료에 주력하는 한편 민간인 진료에도 최선을 다했다.다수의 의료진들은 근무기간인 6개월이 지난 후에도 복무기간을 연장해 1~2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한 권오설(1897~1930), 이선호(1904~1950), 박래원(1902~1982), 이동환(1901~1982) 선생이 선정됐다.조선공산당, 천도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등 국내와 해외 각지에서 종교와 정치 이념을 초월해 여러 세력들이 민족협동전선체를 형성하고, 국내 의거를 순종의 장례일인 1926년 6월 10일로 정하고 이를 추진했다.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인 권오설 선생은 6·10만세운동의 책임자로 조선공산당과 천도교와의 연결을 맡았고, 박래원 선생은 천도
이달의 6·25전쟁 영웅에 대한해협 해전을 승리로 이끈 백두산함이 선정됐다.백두산함은 해군장병과 가족들의 성금과 정부 지원금으로 마련한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이다. 백두산함은 1950년 6월 25일 동해로 긴급 출항, 대한해협 근해 항해 중 남하하는 적 무장수송선을 발견하고 치열한 교전을 벌였고 그 결과 600여 명의 무장병력이 탑승한 적 무장수송선을 침몰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백두산함의 승조원인 전병익 이등병조와 김창학 삼등병조가 전사했다.대한해협 해전은 최초의 해전 승리이자, 백두산함이 유엔군의 해상교통로 보호와 부산교두보
1928년 11월 광주여고에 다니던 장매성 선생이 주도해 박옥련, 고순례, 장경례 등과 함께 소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여성해방, 민족해방 등을 지향하며 함께 서적을 읽고 토론을 했다.1929년 10월 30일 광주역 앞에서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 간 충돌이 도화선이 돼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독립운동이 시작되자 소녀회원들은 시위운동에 참여해 부상 학생을 돌보는 한편 물주전자를 들고 다니며 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도왔다.이후 장매성 선생 주도로 투쟁본부를 마련해 시위를 준비하며 등사판으로 수천 장의 격문을 인쇄해 11월 12일 시위현
1951년 국군 제6사단은 제2연대를 경계부대로 북한강과 홍천강 남쪽에, 제19연대를 주 방어지역인 용문산 서쪽에, 제7연대를 동쪽에 배치해 결사항전의 전투준비태세를 갖췄다.5월 17일 중공군은 3개 사단을 투입해 군 제6사단에 집중적인 공격을 감행했고, 이어 19일경 3대대 10중대 진지 전방 10~20m 거리까지 접근하며 맹공을 해왔다.당시 제6사단 제2연대 3대대 10중대의 정훈병이었던 서기종 일병은 적의 돌격에 중대장이 일시 후퇴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뛰어나가 소총 사격과 함께 빼앗긴 진지로 달려가며 “중대장님은 건재하다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미주지역의 독립운동 연합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이끌었던 김원용(1896~1976)·전경무(1898~1947)·심영신(1882~ 1975)·민함나(1888~1952) 선생이 선정됐다.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 독립운동을 위해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의 재미한족 9개 단체 15명의 대표들이 1941년 호놀룰루에 모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해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발표했다. 이와 함께 독립운동 단체를 통일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김용호 중위는 1952년 3월 해병대 소위로 임관해 장단지구를 방어하고 있던 해병대 1연대 11중대 3소대장으로 참전했다.당시 장단지구는 서울에서 불과 40여km 거리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이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1952년 3월부터 국군 해병대와 중공군 간 치열한 격전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그해 10월 31일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 감행 때 김 중위는 장단지구 사천강 지역 전초진지에서 증강된 1개 소대의 병력으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을 맞아 백병전까지 벌이며 결사적으로 진지를 사수했다.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적이 끝내 진지에 난입하자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1919년 4월 4일 대호지·정미 독립만세운동에 주요한 역할을 한 이인정(1859~1934)·송재만(1891~1951)·한운석(1884~1950) 선생이 선정됐다.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 유생들은 지역의 유생과 회합을 갖고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했으며, 대호지면사무소 직원들이 구체적인 실행을 추진했다. 이들은 먼저 군중을 집합시키기 위한 공문을 만들었고, 대호지면사무소 직원이었던 송재만 선생이 면내 8개 마을에 공문을 전하는 한편 한운석 선생에게 계획을 알리고 독립만세운동 때 부를 노래의 작사를
이달의 6·25전쟁영웅에 351고지에서 작전 중 전사한 임택순 공군 대위가 선정됐다.임택순 대위는 1951년 7월 공군사관학교 1기로 졸업해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뛰어난 조종술과 사격술로 항상 편대의 선봉에서 적의 탱크진지 공격과 보급로 차단, 격전 중인 지상군에 대한 근접항공을 지원하는 작전 등에서 눈부신 활약을 선보였다.1953년 3월 6일 그는 적군의 자동화기 진지가 결집돼 있어 동부전선 보급품 집결지로서 매우 중요한 요새였던 강원도 고성 월비산과 351고지에 출격해 아군 제5사단을 위한 근접항공작전을 수행했다. 그는 작전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대구에서 다혁당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했던 권쾌복(1921~2009)·배학보(1920~1992)·유흥수(1921~2016)선생이 선정됐다.세 선생은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으며, 1941년 2월 유흥수 선생은 권쾌복 선생과 배학보 선생 등을 만나 대구사범학교 항일운동 역량을 결집할 통합된 비밀결사를 제안했고.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했다.다혁당은 총무, 문예, 예술, 운동부 등 4개 부서 둬 기존의 학내 항일 활동을 계승했다. 다혁당은 결성된 지 5개월여 만에 일제 경찰에 발각됐으며, 이어 대구와 대전을 비롯한 전국
마량산 전투는 1951년 10월 3일부터 8일까지(1차), 같은 해 11월 4일부터 6일까지(2차) 경기도 연천 임진강 부근 마량산에서 영국군이 중공군과 벌인 전투다.제1차 마량산 전투에서 영연방 제1사단 제28여단 소속 왕립호주연대 제3대대가 전곡 부근 방어선에서 10km 북쪽의 마량산을 점령했다.그러나 이후 중공군은 11월 4일 강력한 포격과 함께 전면 공격을 감행해 제2차 마량산 전투가 시작됐다.제1차 마량산 전투 후 마량산 지역을 인수한 영국 왕립스코틀랜드국경연대 제1대대는 제2차 전투에서 중공군에 밀려 끝내 마량산을 포기할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호남의병으로 활약했던 기우만(1846~1916)·박원영(미상~1896)·김익중(1851~1907) 선생이 선정됐다.기우만 선생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 2월 장성향교에서 최초로 호남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나주에서도 이학상 선생을 중심으로 편제를 갖추고 기우만 선생이 일으킨 호남의병을 적극 지원했다. 장성, 나주에서 세를 얻은 기우만 선생은 광주를 중심으로 대규모 의진을 구성해 서울로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박원영 선생은 기우만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자 바로 참여했고 나주에서 광주로
이달의 전쟁영웅에 피의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기습 공격을 하던 중 적의 포탄 파편을 맞아 쓰러져 3일 만에 전사한 김갑태 육군 중령이 선정됐다.김갑태 중령은 부산에서 출생해 1949년 5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졸업,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그는 1951년 강원도 한석산·가리봉 전투 등에 참여해 공적을 세웠다.1952년 4월 육군 제3사단 22연대 1대대 1중대장으로 부임한 그는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북방, 우두산 일대의 방어 임무에 투입됐다.1952년 10월 2일 1중대장 겸 1대대장 대리 임무를 부여받은 김갑태 대위는 선두에서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