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 라루 선장은 35세에 7,600톤 화물선의 선장이 됐고, 6·25전쟁 중 명령을 받아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흥남부두로 향했다.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했지만 중공군의 개입과 매서운 추위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흥남철수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12월 15일 시작된 흥남철수작전은 군인, 피란민, 군수물자를 선박을 통해 이남으로 철수하는 작전이었지만 군인들과 피란민들을 다 태우기에는 선박이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레너드 라루 선장은 단 한 명의 피란민이라도 더 승선시키기 위해 군수물자를 버리고 1만4,000여명의 피란
하와이에 주둔하던 미군 25사단 5연대 1대대 중대장이었던 로버트 리 티몬스 대위는 1950년 한국에 파병됐다.그는 중대장으로서 중대원 100여명과 함께 경남 함안군 서북산을 고수하다가 적의 습격을 받고 부상을 당해 후송되는 중에 북한군의 기관총 공격을 받고 장렬히 전사했다.그가 임한 서북산 전투는 6·25전쟁 중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 방어 전선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미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은성무공훈장을 1951년 추서했다.한편 1995년 그의 아들 리처드 F 티몬스가 미 제8군사령관(중장)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1924년 2월 15일에 태어난 박양규 순경은 전라남도 나주시 나주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나주지역 방어를 위한 위수대로 활동했다.1950년 9월 10일 나주시 교동 소재 나주중학교에서 적정 탐지차 매복 근무를 하던 중 혈혈단신으로 적과 교전하여, 적 7명을 사살하고 5명에게 중상을 입힌 후 장렬히 전사했다.1951년 고인의 충의를 기리기 위한 충혼비가 나주역사공원내에 건립됐다.나주경찰서는 매년 경찰의 날인 10월 21일 충혼비를 찾아 참배하고 고인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있다.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중장은 미국 버지니아주 루레이에서 태어나,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1915년에 졸업했다. 이듬 해 육군 보병장교로 임관 후, 제1·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했고, 종전 후에는 맥아더 총사령부의 인사참모부장 및 참모장을 역임했다.6·25전쟁에 참전한 그는 미 제10군단장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원산상륙작전에서 상륙군을 지휘해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까지 진격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악화되자 흥남에서 철수작전을 계획·지휘했다. 흥남철수작전은 병력 및 군수물자 수송이 주 계획이었으나, 알몬드 중장은 현봉학 등의 건의를 받
지리산함(PC-704함)은 6·25전쟁 직전 국민의 성금으로 도입한 최초의 전투함 4척 중 하나로 1950년 7월 배치된 직후부터 전선에 투입됐다.지리산함은 1950년 덕적도와 영흥도를 탈환해 인천상륙작전의 관문을 열었고, 1951년 황해도 월사리에서 피난민과 유격대원을 구조하는 등 수많은 작전에서 전공을 세웠다.지리산함은 1951년 원산해역에서 적의 기뢰부설 저지를 위해 야간경비작전을 강행하던 중 새벽 적의 기뢰에 접촉돼 함 침몰과 함께 승조원 57명 전원이 전사했다.지리산함 57용사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이태영·권순달 중령,
란가라지(A.G.Rangaraj) 중령은 1950년 11월 20일부터 1953년 2월 27일까지 인도 제60공정야전병원 지휘관으로 최전방 부대를 뒤따르면서 전상자들을 치료했다.제60야전병원은 영국군과 함께 최전선에 투입됐다. 란가라지 중령은 직접 수술조를 편성하고 전장을 누비며 환자를 수술하는 등 의무병들을 진두지휘했다.1951년 주암리 북쪽에서 중공군과 호주군이 격전을 벌이는 동안 제60야전병원 위생병들은 최전방 고지까지 나가 중상자들을 들것으로 실어왔다. 이때 많은 중상자들이 후방병원으로 신속히 후송돼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그
192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장철부 중령은 1944년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 재학 중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 전선에 투입됐으나, 2번의 탈출 시도 끝에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했다.그는 자신의 일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치기로 결심하고 본명 김병원을 장철부로 개명했다. 이후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제1지대 제1구대 유격대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그는 군사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김구 선생의 추천으로 중국 황포군관학교 기병과를 졸업했다.이후 1948년 육사 5기로 임관한 그는 중대장, 전술학 교관 등을 지
6·25전쟁 중 활약한 철도 기관사·부기관사가 이달의 전쟁영웅에 선정됐다.1950년 7월 19일 충북 영동역에서 김재현 철도 기관사(1923.9.21~1950.7.19)와 현재영(1928. 3.29~2010.7.19), 황남호(1928.12.29~2006.1.27) 부기관사는 군수물자 후송 작전에 참여했다.이들은 미군 결사대 30여 명을 기차에 태우고 이미 북한군이 점령한 대전까지 가서 ‘윌리엄 딘 미군 소장과 우군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기관차가 대전-세천 구간을 지나던 중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미군 27명이 전사했고, 김재
1928년 광주에서 태어난 성관식 소령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적군과 아군 간 전선이 교착되어 고지쟁탈전과 진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에 그는 해병 제1연대 3대대 2소대장으로, 경기도 장단 일대에서 중공군과 대치하게 됐다.중공군이 대규모 인해전술로 성 소대장이 방어하고 있던 장단 사천강가의 제36전진 진지를 포위·공격해오자, 성 소대장은 연대 포병지원으로 적의 후속부대를 차단시키고 교통호까지 진입한 적과 격렬한 수류탄전과 육박전을 벌이며 진지를 사수했다.성 소대장은 적군의 포격으로 참호가 무너지면서
193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난 이재국 소령은 1952년 조종간부 1기생으로 임관한 후, 같은 해 9월 강릉기지에 배속되어 북한 지역에 있는 적의 벙커와 유류저장소, 포진지, 보급품집적소 등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그는 10월 한 달 동안 거의 매일에 가까운 28일을전투 비행에 나섰으며, 첫 출격 이래 7개월의 작전참여기간동안 총 99회 출격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1953년에는 지상군과의 공지합동작전에 참가한 이 소령은 특히 고성일대 지상군전투지역에 대한 근접항공지원작전에 참가해 적을 무력화시키고 아군의 사기를
1928년 충북 진천군에서 태어난 김영국 육군 대위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종합학교 제9기생으로 입교해 군사교육과 훈련을 마치고 육군소위로 임관한 후 제2사단 32연대에 배속된다.제2사단은 1951년 6월부터 적근산에서부터 김화 동쪽에 이르는 산악지대에서 방어작전과 전방에 대한 수색작전을 펼쳤고, 적과의 치열한 공방 끝에 734고지를 확보한 후 32연대에 진지를 방어하도록 했다.김영국 중위가 지휘하는 7중대는 연대 수색중대와 함께 734고지 전진거점을 전담하며 적의 공세에 대비했고, 중공군 제80사단 239연대가 734고지를
박평길 육군 병장은 강원도 고성군 수동면 564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적의 토치카에 수류탄을 던져 적군 10여 명을 폭사시키고 적과 백병전을 벌이다 전사했다.1925년 제주읍 이도리에서 태어난 박 병장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참전을 결심하고 부인과 자녀를 남겨둔 채 육군에 입대했다.1950년 10월에는 보병 제11사단 13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에 편성돼 전북 지역의 북한군 패잔병 주력부대를 분쇄했고, 1951년 4월에는 동부전선으로 이동해 제9중대 2소대 분대장이 됐다.같은 해 6월 강원도 고성군
전병익 해군 중사는 1929년 충북 음성에서 출생했다. 1947년 해군에 입대해 1950년 4월 우리나라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에 배치됐고, 전쟁 발발 직후 대한해협 해전에 3인치 포 장전수로 참전했다.1950년 6월 25일, 1,000톤급 북한군 무장수송선이 무장병력 600여 명을 싣고 부산 동북방향 30마일 해상에서 남하했고, 전병익 중사가 치열한 교전 끝에 다음날 북한 무장수송선을 격침해 대한해협 해전의 승리에 기여했다.그러나 전 중사는 교전 중 적선이 발사한 포탄에 장렬히 전사했다.대한해협 해전은 해상교통로 출입항의
김금성 공군 준장은 1950년 10월 공군 소위에 임관해 공군비행단 비행대에서 정찰을 비롯한 비행임무를 수행했다.그는 1951년 10월부터 강릉기지에서 F-51 전투기로 출격을 시작해 평양 근교 승호리 철교차단 작전, 송림제철소 폭격 작전, 351고지 탈환을 위한 근접항공 지원 작전 등 한국 공군이 출격한 거의 모든 주요 작전에 참가해 획기전인 공을 세웠다.김 준장은 전쟁 기간 중 전투비행대대장, 작전과장 등을 역임해 비행단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전투조종사로서 출격 195회를 기록했다.또한 작전 중 8번이나 그의 전투기가 적
이성가 소장은 1922년 만주 출생으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임관해 1949년 10월 태백지구 전투사령관으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했다.북한군 제5사단이 양양과 강릉을 잇는 해안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국군 제8사단을 공격하자 당시 제8사단장이었던 그는 북한군과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이며 북한군을 막아냈다.이어 영천전투에서 이 소장은 북한군 제15사단을 역습해 뛰어난 작전지휘로 반격의 기반을 마련해 빼앗긴 영천을 탈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영천은 대구와 포항 중간에 위치한 교통의 중심지로 북한군이 점령할 경우 낙동강 방어선
공해동 하사는 1931년 경상북도 달성군 출생으로 육군에 입대해 수도사단의 기관총사수로 복무하면서 수도고지 전투에 참전했다. 1952년 9월 6일 중공군으로부터 수도고지를 빼앗긴 수도사단은 제26연대가 6차례 탈환전을 전개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제1연대가 임무를 교대해 9월 9일 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이후 제1연대는 수차례에 걸친 적의 공격을 물리치면서 고지를 끝까지 사수했는데, 이때 기관총 사격으로 적의 공격을 지연시킨 공해동 하사의 활약이 컸다.9월 13일 새벽 1시 15분, 적의 출현이 급히 알려지자 공 하사는 수도고지
홍은혜 여사는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자인 고 손원일 제독의 부인이다. 홍 여사는 1917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이화여전(현 이화여대) 음악과를 졸업하고 손원일 제독과 결혼했다.1945년 손 제독이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을 창설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하면서 홍 여사도 대한민국 해군을 위한 봉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그는 우리나라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의 구매를 위해 해군장병 부인들과 삯바느질로 전투함 구매 자금을 모으는 데 앞장섰다.또한 그는 6·25전쟁 중에 부상당한 해군과 해병대 병사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정전
김재호 일등병은 1926년 전라남도 광양군 출생으로 육군에 입대해 수도사단 제26연대 1대대 3중대 1소대 소총수로 복무하면서 수도고지 전투에 참전했다.1952년 7월 7일부터 10월 14일까지 이어진 수도고지 전투에서 그는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수도고지를 사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10월 6일, 중공군의 전차 4대가 수도고지에 포격을 가하고 6,000여 발의 포탄을 일대에 쏟아부으며 집중 공격을 가했다.김재호 일등병은 전차포 사격에 엄체호가 무너지면서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다른 전우들이 모두 전사한 가운데 홀로 정신을 차리고
김문성 해병대 중위는 1930년 제주도 서귀포 출생으로 1951년 3월 해병대 소위로 임관해 해병 제1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장으로 중동부 전선 도솔산지구 전투에 참전했다.그 해 6월 해병대 제1연대는 도솔산에서 북한군 최정예 제12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도솔산은 중동부 전선의 핵심 요충지였으며, 북한군의 저항 또한 매우 거셌다.이 작전에서 김문성 소대장은 24개 목표 중 가장 험준한 지점에 투입됐다. 적은 난공불락의 지형적 이점을 이용해 자동화기로 집중 공격했고, 김 소대장은 총탄을 무릅쓰고 선두에서 소대를
조관묵 경감은 1927년 강원도 양구군에서 태어나 경찰에 임용됐다. 6·25전쟁 당시 양구전방은 백석산지구 전투, 양구 동북방 피의능선 전투 등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조관묵 경감은 춘천 경찰서 양구파견대 중대장으로 대원 30여 명과 함께 양구지역의 치안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과 동시에 춘천이 수복되자 조관묵 경감은 인민군 제10사단 소속 1개 연대 4,000여 명의 패잔병과 대치하며 양구군 소재지를 사수하던 중 패잔병의 습격을 받아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내평리까지 후퇴했다.조 경감은 다시 반격을